그 자리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 김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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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 김병일 목사

김병일 0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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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 자리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본문 : 요한복음 4장 5~6절, 11장 9~11절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모든 이에게 하루의 시간은 틀림없이 똑 같이 주셨습니다.

이것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구나 이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약속으로(허락으로) 누리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요!?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부르심(롬11:29)대로 능동적으로 표현하는(예배하는) 것이며 그 시간 안에서 누리고 있는 거룩한 행복과 정직한 의지로 세상에 당당히 나타내 보이는 삶이 순수한 자유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어제보다 오늘의 시간 안에서 더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결박에서 풀려나는 그 순간에서…, 내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샘물(생명)의 언어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나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써서 마시지 못하는(출15:23) 쓴물이 등장하고 또 하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요4:14) 샘물(단물, 생명수)이 등장합니다.


하루의 시간 안에서, 둘 중 나는(!) 어떠한 물로 내 배 안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중에서 오늘 중 나는(!) 얼마만큼이나 쓴물로 채웠는지 또는 샘물(단물)로 채웠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누가복음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같은 물인데, 다른 본질의 물이 내 입으로 들어가니 누구에겐 선에서 선으로 또 누구에겐 악에서 악으로 낳게 됩니다.

다른 본질, 두 종류의 물이 내 배(나, 가정, 사역, 사업 등…)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그 시작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입에 쓴물(악)을 넣을 것인가(!) 아니면 샘물(선)을 넣을 것인가(!) 선택은 내 몫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요4:5)에 오셨습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과 혼혈(인종이 다른 혈통)로 생겨난 사람들(왕하17:24~40)이라고 해서 ‘사마리아인’ 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볼 때 같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역에 있는 작은 동네, 수가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때는, 무척이나 더운 지역이었고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그것도 가장 더운 시간, 정오에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요4:6)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을 세 번 표현하고 있는데, 먼저는 6절에 있고 그리고 11절과 12절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물'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프레알’은 히브리어 '베알'과 라틴어 '푸테우스'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6절의 ‘우물’에서 번역된 '페게'는 히브리어 '아인'과 라틴어 '폰스'에 해당하는 의미로서 그 뜻은 “샘”입니다. 그리고 11절과 12절에서 사용된 '프레알'은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우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샘(물)이 풍부(신8:7)한 곳이었습니다.

때가 되어 언약의 이곳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가장 뜨거운 시간 정오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의 ‘우물(샘물)’에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각자의 시선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다음으로 7절에, ‘사마리아 여자’가 야곱의 ‘우물(샘물)’ 있는 가까이로 등장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언약의 우물을 늘 상 이용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마리아 여자는 야곱의 ‘우물(샘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인으로 보이는(요4:9a) 점잖은 분이 우물가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함께(상종)하지 않았습니다.(요4:9b)

그런 가운데, 사마리아 여자의 눈에는 뜻밖의(평생 잊지 못할) 시간으로 기억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에게 찾아 오셔서 만나 주셨던 주님, 그 짜릿했었던 그때의 그 하루 그 시간을 아직도(!) 가슴 설레며 기억을 하시는지요?


요한1서 3:11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부탁합니다.

물을 좀 달라고(요4:7)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선물(요4:10)을 받았기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다른 사마리아 여자들은, 오전 또는 오후에… 그리 덥지 않은 시간대에 편안하게 오가며 우물가를 이용하며 다녀갔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여주인공, 사마리아 여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녀에게 이유가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다른 여자들과 함께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여자는 가장 더웠던 정오 시간에 그것도 인적이 없었던 그 시간에 야곱의 ‘우물(샘물)’에 왔다 갔다 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야곱의 ‘우물(샘물)’을 다녀가는 걸음 걸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떠한 마음으로 다녀갔을까요?! 어떠한 가슴으로 기도하며 다녀갔을까요?!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것도 같은 시간에…, 그것도 혼자서…, 매일 매일 같은 장소에 물동이를 갖고 다녀가야만 했던 것은 그 마음에 채우고 싶었던 갈급함 때문에…, 그 마음에 목마름을 채우고 싶었던 간절한 기도 때문에…, 그녀는 매일 매일의 하루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가 7: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사마리아 여자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었던 그것은 바로 텅 빈 마음(목마름)을 어떻게든 채워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까지 또 다른 남편을 만났었지만(요4:18), 매번 그 목마름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지금의 여섯 번째  남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영적인 해석을 전하고자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을 잘 돕지 못하는(일방적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섯 번씩이나 혼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문화로 볼 때, 여자의 권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이유가 맞다(!)고 볼 수 없겠지만, 다섯 번씩이나 혼자가 된 건 현실적으로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마리아 여자에게 분명 어떤 문제점이 있었다고 단정하며 편견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마리아 여자들처럼 그 시각으로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현실적 문제로 밀려오는 사마리아 여자의 그 사실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는 더 무거워 졌으며, 그에 비례하여 사마리아 여자의 상한 심령 또한 더욱 더 커져만 갔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첫 번째 남편부터 여섯 번째 남편까지 함께 동거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원하셨던 말은, 어떠한 깨달음과 깨우침의 고백(마음)으로 듣고자 했을까요?


그 세월이 짧았든…, 아니면 길었든 간에 사마리아 여자에겐 결코 쉽지 않은 고생의 터널이었고,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녀는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쉽지 않은 그 시간동안에,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셨던 특별한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은혜에 따라 각자의 시작과 과정은 누구에게나 다릅니다.

참 신랑이신 예수님이 참 신부(여자)로 부르셨을 때, 그 신부의 마음을 먼저 보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신부(여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뜻하셨던 부르심에 이르도록 만드셔야(눅8:15) 하는 과정들이 그녀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아니었을까요?!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올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


어제는 더 이상 성장하고 있는 오늘의 내가 아닙니다.

새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신부(여자)는, 오늘부터 새 창조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매일 매일 마다 야곱의 ‘우물(샘물)’을 찾는 사마리아 여자(!)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겹게 물을 깃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참 신부가 될 사마리아 여자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본문의 다른 구절을 살펴보며 적용을 해볼까(!) 합니다.

두 번째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나사로’입니다.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입니다.

이들은 ‘베다니’ 지역에 사는데, 베다니의 뜻은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사랑하는 자(나사로)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인데, 곧 죽음앞에 있는 매우 응급한 상태에 있는 병자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먼저 가셔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에게는 나흘이 되서야(요11:17) 현장에 오셨습니다.


성경에서 나흘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 중 창조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사로를 다시 창조하실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1장 4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만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는…, 전지전능하심을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보여주시겠다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아들에게 영광을 위하여 나사로를 선택하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사모하며 인내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를 마음에서 흔들리지 마시고, 믿음(순종)으로 직접 보여 주시는 사랑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요11:9)”라고 말입니다.

낮 정오는 가장 뜨거운 시간입니다. 그림자가 최소로 보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비록 친구 하나 없어도…, 그 시간에 알아주는 이가 하나 없어도…, 그 시간에 외로이 묵묵히 혼자 있어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시간이 네게 가장 축복의 때(시간)라고 말입니다.


영은 안(영과 혼)에서 밖(몸)으로…, 세상은 밖(몸)에서 안(혼과 영)으로…, 항상 내게로 밀려오는 영향(빛과 어둠)에 따라 반응하며 선택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래서, 매순간순간마다 자기를 성찰(점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예전에 주셨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에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선택하며 하루를 움직이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잠잠히 기다려 보세요. 생각들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하루를 되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또한 그 생각들을 참회일기로 남겨 보세요.

점점 소망으로 살아나는 나의 선택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 선택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금방 찾아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나사로, 그 이름대로 다시 창조되는(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부를 때 친구(요11:11)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아니 이번 한 주간, 실족하는 마음이 생겼습니까?!

그래도 소망(희망, 행복)만은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친구 되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곧, 나를 깨우러 오실 것입니다.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 그리고 마리아도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32)”라고 애타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실족(절망)이 아무리 땅에 떨어졌다 해도, 예수님 우리의 주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11:33)” 그러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처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시는 친구 같은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스스로 창조주임을 만 천하에 보이셨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순종이 아니라 근심 걱정을 동반한 두려움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믿는 우리에게 있는 한, 두려움은 결코 믿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바로 ‘믿음’입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부르심, 그것은 바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잘 살아 가십시오. 믿음은 바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의 샘물이 시작되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란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사마리아 여자도 책임지셨고, 죽은 나사로도 책임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 또한 마땅히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주간에도 부활되시는 예수님의 소망과 생명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2020.9.6 주일 설교문

글, 김병일 목사

축복성교회 담임

교회정보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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