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용서,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 김병일 목사

Gospel message

교회가 교회를 돕는다!

홈 > 말씀찬양 > 복음메시지
복음메시지

이해와 용서,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 김병일 목사

김병일 0 282

65bd448beea4badbf832c408aef9e6a2_1601745445_2726.jpg
 

제목 : 이해와 용서,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장 2~7절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이렇게 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용서할 수 있는 마음까지라고 말예요.


오늘 본문의 7절을 보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보면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진행형이 아닌 완료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자기의 백성을 꼭 부르십니다.

여기서 부르셨다는 말은, 그에게 맡겨야 할 일(부르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따라 주어진 무기도 능력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멋있게 보이는 하나님의 일 그리고 빛나게 주목받고 싶은 하나님의 일만 바라보다, 정작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에는 등한시 한건 아니었는지(!) 깊이 조명해 보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사랑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건, “모든 믿는 자(성도들)의 본(모범)이 되라”고 그것도 완료형(최종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근 들어, 내 가까운 분들의 마음에서(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막7:16) 나오는 말들을 살펴보십시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 특히 이번 연휴를 통해 더 많이 쏟아져 나온 말들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우리에게 다 들려지고 있다는 말들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숨 쉬는 것처럼…, 우리 안에 무작정(분별없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공기가 너무나 탁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혼탁해지고 있다는 건,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무질서해 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6절의 말씀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영혼이 혼탁해지면 맨 먼저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까지 자신도 모르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분의 본질(하나님의 형상)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인생)에 사는 사람이 믿음을 사수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기란 결코 쉬운 일(마7:13~14)이 아닙니다.

인생을 만드신 분이 그 사람에게, 네가 지금부터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인생을 만드신 분의 모든 소유입니다.

그래서 이 선을 인생들이 넘어서는 안 됩니다.

넘어서는 순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주님은 주인의 자리에서 자기 뜻(방향)대로 인생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14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찬양의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은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끝나야,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내가 깨져야, 내가 무너져야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신다

나의 모든 실패가 하나님의 승리가 되고

나의 모든 절망이 하나님의 소망이 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그렇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는 모든 사람들…, 그 가운데 택하신 자들 중에서의 ‘누구든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류 전체들 가운데…, 특별히 택하신 자들 중 ‘누구든지’ 네가 믿는 자(성도들)의 본(모범)이 되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만남에서 또 만남으로 그리고 새로운 만남으로 연결되며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우연 속에서 피어난 필연(축복의 만남)인 것입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생각하면, 더 이상 주인이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필연이기 때문에 모든 만남에는 아버지의 뜻이 그 안에 숨겨져 있으며, 

주님의 섭리에 따라 역사의 시간 속에 내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크게 보지 못하고, 멀리 보지 못하면 금방 시험이 올 수도 있으며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사람(먼저 된 사람)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믿는 자(나중 된 자)들 중에서도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자는 풍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배에서 잠자고 계시는 예수님은 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 구절이 있습니다.

그건 "믿음의 역사" 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의 역사”가 수직적인 하나님의 관계라면, “사랑의 수고”는 수평적인 사람의 관계입니다.


어느 한쪽만(날개가) 대단하다고 해서, 균형 있게 창공을 날 수 없습니다.

두 날개로 균형 있게 날아야 창공을 높이 올라갈 수도 있으며, 멀리 날아 갈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주님의 감동이 떠올랐습니다.

“종아!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며 지키는 것이란다.”


이 감동으로 3절 말씀에 시선을 고정하게 하였습니다.

먼저 “믿음의 역사”에서, 역사는 헬라어로 엘곤이라고 합니다.

이는 노역, 행위, 수고, 일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밖에서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수고”에서, 수고는 헬라어로 코포스라고 합니다.

이는 벤 상처, 수고, 고통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안에서 나타나 보이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믿음에는 반드시 그만한 노동과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사랑에는 반드시 그만한 아픔과 수고와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매우 비관적입니다.

하지만, 노역 430년과 광야 40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쉽게 세워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큰 일에는 반드시 큰 믿음과 수많은 수고(고통)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과 믿는 자들(누구든지) 중에서 본이 된다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기다려 줘야 합니다.


누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으니, 그래서 주님께 모든 걸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빨리 맡기는 게 현명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마귀는 믿는 자들의 자유(마음)를 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의심과 두려움을 넣어 조정합니다.

주님께 모든 짐을 맡기지 못하도록,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심습니다.

그 생각들이 뿌리를 내리는 순간부터, 근심으로 점점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은 구원을 이루는 생명의 길로 인도를 하지만,

마귀가 주는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본문 3절, 중간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인생에 있어서…, 목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주 예수님께 나의 모든 마음의 시작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완벽한 인성을 갖고 계시며,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따르는 모든 자들이(누구든지) 올바른 믿음으로 잘 세워지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특정한 계기를(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믿는 신도의 신앙이 아니라, 끝까지 흔들림 없이 올곧게 바라보며 나의 모든 중심(동기)을 그 분에게만 집중하며 사모할 때, 예수님의 영성으로…, 예수님의 성품으로…, 매일 매일 새 창조로 변화되어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는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믿음이 오면 그대로(단순하게) 순종해야 하는 것과,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이해와 용서로) 품어야 하는 것인데 끝까지 인내하며 품어야 하는 것이며, 오직 한 소망만을 바라보며 나의 모든 마음을 고정하며 그 분만을 따를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바로 이것은, 5절에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를 부르신 이(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서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불순종인데, 그건 하나님 앞에서 매우 못마땅한 불충한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그래서 말로 내가 앞서고 싶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장본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내어 드리십시오.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닌, 주님의 자리가 되도록 온전히 내어 드리십시오.


그래서 주님은 부르신 자들에게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을 얼마큼 받아야 할까요? 이렇게 간구해 봅시다.

성령 충만이 100%까지 원하는 기도라면, 자기만 만족하며 살면 되지(!)라는 인색한 마음(중심)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101%이상으로 성령 충만하도록 부어 달라고 기도를 하는 겁니다.


이는 성령 충만이 내게서 머무는 만족이 아니라, 땅 끝까지 흘러 보내는 데까지 넘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성령의 충만함을 흘러 보낼 수 있도록 해야, 누구든지 큰 교회도 큰 사역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지금도 세계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제가 예전에 그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교사님, 어떻게 하면 세계선교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강도사였습니다.

강도사님,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세계선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요. 나와 한 몸처럼 함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주의 종들이 마지막 때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우리가 불순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졌다면,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끼워야 합니다.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하나님의 불순종은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된 시점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한 몸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 때문에 한 몸이 두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시 한 몸으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12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를 다시 한 몸 되게 만드시는지,

그 역할들을 말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4~12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다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하게 하시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성부, 성자, 성령)는 한 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같은 성령으로 각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한 성령으로 모든 일들을 다 하시고 계시는 것을 직접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에덴동산 때처럼 다시 한 몸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시 한 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는 것 뿐입니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우리는 살아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죽으신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 되는 것도, 반드시 되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한 몸 되기를 거부하는 나의 모든 죄성과 악성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하십시오.

나의 틀어진 믿음과 태도에서 이 순간 십자가로 못 박으십시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것만이 나의 모든 영혼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 가운데 맡겨진 모든 문제들까지 회복이 될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기쁨으로 웃을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6: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멘.



2020.10.04 주일 설교문

글, 김병일 목사

축복성교회 담임

교회정보넷 대표

0 Comments
포토 제목
00be09c83a56a5ba4fb94af578581995_1602812375_112.png

최근글


새댓글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