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과 3‧1 대한독립 만세운동
지난 금요일은 3‧1절 100주년을 맞는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빼앗겨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은 고종을 폐위하고 조선 민중들을 짓밟았습니다. 젊은 남성들을 징용으로 전선에 총알받이로 내몰고 탄광이 있는 군함도나 군수공장에서 굶주림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습니다. 젊은 여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로 삼았고 군수공장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자원을 빼앗아갔습니다. 지하자원은 물론이고 무기를 만들기 위한 쇠붙이를 공출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굶주리는데 쌀을 빼앗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민중들은 이역만리 만주로 사할린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국민은 일등국민인데 조선 사람은 이등국민이어야 했습니다. 조선을 개화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룬다는 말은 허울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사람은 모든 면에서 차별을 당하고 일본을 위한 보조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일본과 학제를 달리하여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어려워 교육 받을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조선 사람은 정당한 재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범죄가 아니라 정당한 요구를 할지라도 재판 없이 일본 순사가 마음대로 처벌 했습니다. 재판을 받는다 할지라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판사가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등법원의 경우 조선인 판사는 겨우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3‧1운동이 그 대표적인 거사였습니다. 고종황제의 승하로 모든 조선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렇지만 슬퍼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여운영, 김규식을 비롯한 신한청년당은 식민지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일본 강요에 의한 한일합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독립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던 우리 민족에게 파리 강화회의는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상해를 방문하고 있던 크레인이 제공한 정보와 조언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대표단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의지를 전 세계에 나타내어야 했습니다. 김규식을 비롯한 대표단을 파리에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 것입니다.
일본 유학생들이 제국주의의 심장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참여했습니다. (기독교인이 16명, 천도도가 14명 불교인이 3인) 기독학생들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모여든 동포들이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3‧1운동 당시, 1919년에는 기독교인이 1%정도밖에 안됐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이나 됩니다. 그 외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죽거나 투옥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불의에 대항하고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나라사랑과 헌신을 통해 3‧1운동이 일어나고 광복을 맞이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글, 지용길 목사
예수소망교회 담임
좋은신문.co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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