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들, "본질에 충실한 교회 선호"
평신도들 입장에서 바라는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를 원할까? 목회자 중심인 기성 교회들의 시스템에서는 아무래도 목회자의 목회 방향에 따라 교회가 움직여지게 마련이다. 평신도의 눈으로 그리는 교회상은 그동안 기성교회에서의 목회 습관을 그대로 답습한 교회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지난달 본지가 미주한인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평신도들의 신앙생활 스트레스 정도’에서 평신도들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 내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 목회자의 설교, 교우들과의 관계, 정형화된 구역모임 등을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본지 인터넷판 11월1일 기사 참조>. 이번 호에서는 지난 설문조사에서 지면 관계상 다 싣지 못했던 평신도들이 원하는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가 되길 바라는지 그들이 전해온 얘기를 들어보자.
어머니 같은 교회
세상 풍파에 시달리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이 돼서야 교회를 찾는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교회는 한마디로 어머니 같은 교회를 원했다. 교회를 가면 편안함과 안정감을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얘기다.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아가 교회에 와서 만큼은 희망과 용기, 안식과 격려, 치유와 회복을 받기를 원했다. H 교회 P 집사는 “교회에 가면 왜 그리 바쁘게 돌아가는지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 보면 어떤 설교를 들었는지는 기억은 안 나고 주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며, “바쁜 교회보다 친정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하게 대화도 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허물이 안 되는 교회였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현재 교회를 정하지 않고 주일날만 설교를 듣기 위해 몇 군데 교회를 돌아가면서 나간다는 L 씨는 “목사의 때리는 설교와 치는 설교가 오히려 죄 의식을 들게 해 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리 좋은 말도 때리면 멍으로 남는다. 무작정 가르치려는 설교보다는 성도들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설교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예배 시간에 교회당 확장을 위한 헌금 얘기와 큰 액수의 헌금을 한 성도를 공개적으로 일으켜 세워 칭찬하는 모습은 정말 불편하다”며 교회가 불편한 이유를 들었다.
아버지 같은 교회
하지만 반면에 교회가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평신도들도 있었다. 사랑나눔이란 아이디를 쓰는 유저는 목회자들이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눈치를 너무 보는 목사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도 성도들 떨어질까봐 분명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는 목사들을 보면 비겁해 보인다”라는 다소 정치와 관련된 언급을 했다.
K교회 S성도는 “주관이 약한 목사님들을 보면 교회 자체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분명한 목회 철학과 신학적 소견이 있는 교회가 좋다”고 말했다. 목회자 역시 한 교회의 어른이다. 한 집안의 아버지가 집안이 흔들리지 않도록 가장의 역할을 잘해야 하듯이 목회자 역시 스승이 아닌 아비의 마음으로 교회를 이끌고 간다면 성도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친구 같은 교회
평신도들이 원하는 교회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하기만한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 편안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회를 원한다. 마치 친구를 만나면 편하기도 하지만 뭔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동질성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웨스트 코비나 지역의 U 교회에 출석한다는 P집사는 “교회에 가면 왜 답답한지 모르겠다. 목회자들이 너무 권위적이고 설교가 일반 성도들의 삶과는 릴레잇(관련)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친구를 만날 때처럼 편안하고 활기가 넘치는 교회였으면 싶다”고 전했다. 핫메일을 쓰는 한 응답자는 “200여명의 성도가 있는 중형교회다. 하지만 목사님과의 소통이 원활했으면 좋겠다. 교인수가 늘어가다 보니 급히 기도를 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잘 이뤄지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다”고 밝혔다. 이로 미루어볼 때 평신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만 듣고 예배만 드리고 가는 일방적인 교제에서 쌍방향 교제를 나누며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참 소통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짐작해 본다. 또한 목회자라는 권위가 때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소라면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라도 평신도들의 마음과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난 설문 조사 과정에서 본지로 미 주류 교회인 New Song Church의 주보를 보내온 독자가 있었다. 독자가 보내온 뉴송교회의 주보에는 여느 한인교회의 주보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주보 뒷면에는 매 주마다 바뀌는 새로운 질문들이 적혀 있다. 질문은 교회가 성도들과 새로운 방문자들에게 던지는 것으로 가령 “우리 교회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우리가 말하고 하는 행동들의 어떤 것이 당신을 우리 교회에 속하고 싶게끔 했나?” “영성, 인성, 관계, 선교 등의 4가지 부분에서 어떤 것들이 부족하고, 바꿔져야 우리 교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등이고, 또 다른 유형의 질문은 성도들 스스로가 묻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이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주일 성수를 할 수 없도록 유혹하는 액티비티와 이벤트는 무엇인가?” “뉴송처치와 더 긴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 당신이 변화되어야할 한 가지가 있다면?” “교회의 지체가 아니면서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따른 어려움은 없나요?” 등이다. 교회가 성도와 소통하기를 원하고 무작정 교회가 하는 대로 따라오기를 강요하는 한인교회와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비전과 목표가 분명한 교회
규모가 큰 교회, 재력이 있고 유능한 인재가 많은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교회를 원한다고 답한 평신도들은 한 명도 없었다. 반면 분명한 비전과 목표가 있는 교회를 좋아한다는 답이 있었다. “교인 수 몇 명을 달성하자”, “언제까지 몇 층짜리 예배당을 짓자”, “교회 파킹랏 부지를 사자” 등은 비전이 될 수 없다. 또한 목사 개인의 야심이나 희망이 비전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목표와 전교인이 동의하는 비전이어야 교인들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
의외로 평신도들은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지난 조사에서 보여졌다. 본질에 충실하다는 것은 여러 각도에서 논의 될 수 있겠지만, 평신도들의 시각에서는 목회자의 설교에서 본질의 문제를 짚어냈다. 지난 조사에서 평신도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을 때를 설교 시간으로 꼽았는데, 복음 외의 자기생각, 자기주장, 세상 이야기, 철학, 과학, 성경말씀보다 더 긴 예화, 예수 잘 믿어야 물질의 복을 받는 다는 기복적 설교 등을 하는 목회자와 교회들에 대해 따끔한 지적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된다는 LA 거주자 K씨는 “미주에 아직도 복복하면서 설교시간에 헌금 강요하는 교회들이 대부분 큰 교회인걸 보고 놀랐다”며 “LA 지역 한인교인들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는가?”하며 혀를 찼다. 메스컴과 인터넷 등의 발달로 평신도들은 성경 지식이나 의식적인 면에서 많이 똑똑해졌다. 성도들은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변화되고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교회만을 불리기 위해 얼치기 성도들을 대량 생산해 내는 교회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퀀티티가 아니라 기독교 핵심가치를 추구하는 교회, 소수의 교인들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성도들을 길러내는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앞으로 더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밖에도 보내준 의견에는 가족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 순수한 교회, 교회재정이 투명한 교회,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 등의 내용이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크리스챤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