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 :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토마스 선교사가 런던교회로 보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저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성경책을 가지고 조선 사람들이 환영을 해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떠납니다. 천주교의 오류들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가지고 이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 전하려는 노력을 이사회가 인정해 줄 것을 믿습니다. "
- 런던교회로 보낸 편지 중에서 (1866년 8월 1일)
당시 토마스 선교사는 선교의 기쁨에 조선에서의 복음사역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는 1차 선교여행 조선으로 가는 도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는 불행을 맞이하고 우연히 백령도에 머무르게 된다. 이때 조선말을 배우고 복음을 전한다. 그런데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오늘날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으로 우리나라에서 백령도는 가장 복음화율이 높아 복음화율이 80%이고 백령도에는10개의 교회, 대청도에 4개 교회, 소청도 1개 교회가 있고 이 곳은 제사나 풍어제를 지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1866년 8월 2차 선교여행을 떠난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풍랑에 좌초되어 대동강변에 도착했을 때 제너럴서면호는 조선의 군사들에 의해 격파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배가 불 탈 때 예수를 외치며 배안에 남아있던 성경책을 바다로, 언덕으로 던졌다. 바다에 던져진 성경이 빨래를 하던 조선 아낙의 손에 전해지고 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일화도 있다. 토마스 선교사는 체포되었고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을 베려는 사람을 향해 성경책을 전하며 복음을 전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였던 박춘권은 결국 그 성경을 읽고 후에 안수교회의 인도자가 된다. 또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는 숭실대를 졸업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성경 번역에 큰 기여를 한다.
또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하기 전 12살 최치량에게 성경 3권을 전해주었는데 최치량이 당시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주었고 박영식은 이 종이로 자신의 집을 도배를 했다. 성경 3권으로 도배한 박영식의 집이 훗날 평양최초의 교회 널다리골 교회가 된다. 널다리교회가 장대재 교회가 되고 장대재 교회가 장대현 교회가 된다. 이 장대현 교회에 1907년 1월 14,15일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된다. 이렇듯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평양대부흥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토마스의 순교자의 피가 세워진 터에는 주왕리교회가 세워지고 최근 기념교회 터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이 세워졌다.
글, J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