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 "중국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1832년 5월 21일에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5살이 되자 두 동생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웅변이 뛰어난 감리교 지방 설교자이자 약사이며, 그의 어머니는 매우 온화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의 능력과 어머니의 온유한 성품을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가 허드슨 테일러를 임신했을 때부터 남편 제임스 테일러와 그 아이를 놓고 중국의 사역자로
부르시길 서원 기도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부모님은 약제사였는데, 항상 그의 약국에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그의 친구들은 항상 모이면
감리교회의 발전상황과 선교사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중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말을 곧잘 듣고, 또한 그의 여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허드슨 테일러는 막연하나마 어릴 때부터 중국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허드슨이 11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에 가서 책상 위에 엎드려 기도하면 “와! 허드슨이 기도한다”하며 아이들이 비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후 그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15살의 나이에 한 은행에 취직하였습니다.
그는 선배 동료들의 나쁜 영향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징계로 시력이 나빠져 실직하게 되어 무의미와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 고통하였습니다.
비록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났지만 테일러는 17세가 되어서야 회심하였습니다.
그때는 1849년 여름 그의 어머니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멀리 가고 안 계신 때였습니다.
소년 테일러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져보다가 어떤 종교적인 소책자를 발견했습니다.
영적으로 감동 깊은 것이라기 보다는 재미있게 보여서 읽기 위해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책을 읽어 나가다 그는 엎드렸습니다.
“성령께서 내 영혼에 기쁨과 확신의 빛을 비추셨다….영접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 수밖에 없었다.”
2주일 후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회심에 관하여 얘기했으나 어머니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2주일 전 친구 집에서 갑자기 아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하게 느껴 하나님이
그녀에게 확신을 주실 때까지 친구의 방에서 기도했다는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죄를 깊이 깨닫게 되며, 죄에 대한 완전한 구속과 온전한 값을 지불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으로 인해 자신의 빚이 탕감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느꼈으며, 자신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중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선교사로 그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했으며, 아주 어린 시절에 W.H. 메드허스트의 (China)를 읽고 테일러의 생각은 그 나라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느냐 하는데 온 관심을 쏟았던 그가 이제는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주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후 글리너라는 선교잡지를 구독하기 시작했으며 중국협회 (Chinese Association)에 편지하여
사역소개와 자료 요청을 하게 된다.
그후 반즐리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 중국선교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거기엔 어떻게 가려하지?”
“모릅니다 하지만 옛날 유대 땅에서 열두 제자와 70문도가 지팡이도 전대도 먹을 것도 돈도 없이 자기들을 보내시는 주님이 곧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이시기도 한 것을 믿으며 떠났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오, 얘야. 이제 네가 크면 지금보다 더 현명해 질 거란다 .
그런 생각은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시던 시절에는 통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라고 일축해 버렸다.
후에 테일러는 이 일을 기억하면서 “나는 그후로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결코 더 현명해 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주님의 방법을 따르려 한다면 그리고 그분께서 그분의 첫 제자들에게 주셨던 확신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때 그들 시대에 적합했던 그것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라고 썼다.
또한 항상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이어 전에 알지 못했던 그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위하여 해주신 일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하나님, 제게 저의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써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있은 다음 허드슨에게는 하나님이 자기의 생애가 어떻게 쓰여지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았다는 명백한 확신이 찾아왔다.
“나는 내가 전능자와의 언약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 언약을 철회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음성이 내게 너의 기도는 응답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시간 이후로 내가 중국으로 부름 받았다는 확신은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허드슨 테일러는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가득차있었고, 그 중국 영혼들을 생각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게된다
필생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목적으로, 그는 헐에서 어떤 의사의 조수로 일했으며그후 런던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를 향한 대규모운동으로 잘못 추측되었던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하여 중국에 대해 더 큰 관심과, 그리고 중국의 근접성에 관하여 귀츨라프가 기록한 선명하나 과장된 보고서의 결과, [중국복음 전도협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본적인 훈련에 착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올바른 정신자세와 생활태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잠과 음식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교회생활과 전도생활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중국어를 배우고 의술을 익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빈민촌으로 거처를 정하는 장막훈련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부인의 훈련을 하였습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테일러는 생활에서도 선교훈련을 받는다라고 생각하고, 영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 위해 침대도 없애고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식사도 가장 값이 싼 청어를 커피와 함께 삼키기도 하며, 감자 대신 콩과 쌀 푸딩을 먹고 양배추를 식초에 절여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사과 한 덩어리와 빵만 먹어 야위게 되었으며, 그의 조그만 다락방은 옛날에 그가 썼던 좋은 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심지어 밀린 임금을 지불해 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중국에 가서 사역한다면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얻을 수 없다.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영국을 떠나기 전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육신생활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허약하던 몸이 영양실조로 더욱 약해져 갔으며 해부학을 배우는 동안 실수로 병균에 감염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성열병’에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으며, 여러 달 동안 의학공부를 쉬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처럼 헌신적인 사람 처음봐요. 그래서 너무 부담스러워요.”하며 청혼을 거절하였습니다.
중국선교냐 결혼이냐 하는 문제 앞에서 그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 삶의 방향을 정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시험을 이겼습니다.
허드슨은 물질이 전혀 없는 형편에서 중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기도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임을 믿고, 기도로써 물질을 공급받고자 하였습니다.
한번은 허드슨 테일러가 커다란 병원에 실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중국선교협회로부터 생활비를
부담해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게을러지고, 그만큼 중국선교에 대한 훈련도 안일해질까
두려워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중국어 문법책도 없이 만다린어로된 누가복음을 가지고 사촌인 존과 함께 중국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영어성경에서 누가복음의 짧은 구절하나를 뽑은 다음 그 절의 한 단어를 놓고 그 단어와 같은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 구절을 되는대로 많이 찾습니다.
그 다음 처음의 그 절을 중국어 성경에서 찾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공통된 한자가 나오는데 그것이 최초의 영어단어에 해당하는 중국에 글자가 됩니다.
그 다음 종이 쪽지에 영어 단어와 한자를 같이 쓴 다음 여러 군데에서 쓰임을 정리하다 마침내 확정되면 잉크로 쓰기 시작해 최초의 사전을 만듭니다.
테일러는 이렇게 공부하여 얼마 후엔 웬만한 중국어 한자는 다 알게 됩니다.
그 후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도 공부를 하게 됩니다.
어느날 테일러에게 글리너의 편집국장인 찰스버드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테일러에게 중국선교를 이야기하며, 당신이 의사공부를 중지하고 지금 당장 중국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자네를 파송할것이라고 말합니다.
1년만 공부하면 의사가 되는 터이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1853년 9월19일 CES(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 중국 선교회라는 단체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의 길로 들어섭니다.
마침내 허드슨이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약 다섯달간의 위험한 항해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가 상해에서 자리잡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와 방불한 곳에서 불안감을 느꼈고 물가가 폭등하여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는 별수없이 누더기만 걸치고 거치처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먼지 때문에 눈병까지 앓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땅에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밖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고 생각한 허드슨은
한차례의 전도여행이 끝나면 미처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차례의 전도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강행된 전도여행은 15개월동안 무려 10차례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중국어 신약성경 1천 8백권과 2천권이 넘는 전도 책자들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테일러는 여러곳을 여행하며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해박한 지식 때문도 아니라 잃은 영혼을 향한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한달에 100만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는 그의 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선교의 자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하여 선교회가 조직된 것입니다.
중국 내지 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경험과 성격이 반영되어 독특하게 조직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파에 속하지 않았고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였습니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의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헌신된 남녀 일꾼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선교 단체들과의 쓸데없는 경쟁을 피하고, 중국에서의 선교노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복음화 선교회에서 일해 본 결과 선교본부는 중국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선교사들의 모든 필요를 제때 채워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6살이 되자 허드슨은 영적으로 스승이나 다름없는 윌리암 번즈 목사와 동역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노예 매매가 성행하는 광동성 산두지방에 위험을 무릎쓰고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 지방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 저녁 때 거처로 돌아올 때는 몸이 피곤에 지쳐 다리를 겨우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댓시간 후면 다음날의 전도를 위해서 다시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은 주로 상해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해의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지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테일러는 자신이 신기한 존재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그의 복장과 태도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중국인의 옷을 입고 풍습을 따르는 중국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런 것을, 전통적 방법을 떠난 파격적인 것으로서 올바른 선교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옷을 입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푸른 눈에다 회색 머리를 한 요크셔 출신의 테일러에게 중국인이 된다는 것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리에 걸쳐 있기엔 너무 헐렁한 바지”, “갑갑한 비단 옷”, “굽 없는 신발” 등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나
중국인사이에 섞여 살려면 무엇보다 검은 머리털과 변발을 갖춰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머리털 염색은 큰 소동만 일으키고 실패하였습니다.
머리에 부은 암모니아가 살갗을 태워 하마터면 장님이 될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의사인 선교사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잘 치료해 주어 다시 염색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였습니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이발사에게 맡겼기 때문에 우습지 않게 잘 염색되었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 머리털을 밀고나니 햇볕이 따가워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염색도 5-6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러한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수고는 값진 결실을 나타내었습니다.
비록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잘못된 변발을 하였지만 테일러는 이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서도 중국인들 사이에
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중국인들과 섞여 있을 때 당신이 나를 만나게!
된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변모된 모습을 테일러는 무척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다른 선교사들은 대부분 불쾌감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들은 테일러를 처음에는 골칫덩어리로 여기다가 나중에는 웃음거리로 삼았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자 식구들까지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테일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테일러란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대로 사는 것은 이제 그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 내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생활하기에는 서양 옷보다 중국 옷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테일러와 동행하며 여행을 하던 윌리암 번즈는 테일러가 편리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중국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중국 옷을 입었다고 해서 내지에서 사역하는 모든 어려움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로 여행하면서 의료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그 지역 의사들과 직접 경쟁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지방 의사들이 그를 쫓아낸 적도 있었습니다.
여행 자체도 매우 위험했습니다.
한번은 중국인 짐꾼이 테일러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과 물품을 다 가지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상해로 돌아가 개인적인 헌금이 영국으로부터 올 때까지 동료 선교사의 신세를 졌습니다.
그것은 어떤 후원자가 보낸 헌금액수? 자기가 잃어버린 액수와 똑같은 40파운드였습니다.
중국 선교 초기에 이런 개인적인 헌금이 없었더라면 아마 테일러는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선교본부와 불편한 관계를 가져오다가 1857년 테일러는 정식으로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중국 내지를 돌아다니며, 한 선교사의 말처럼 “열심히 그러나 목적없이” 선교를 하였습니다.
이 후 내륙선교의 Power Station이 된 영파지방에 옮겨온 허드슨은 파커박사를 동역자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외국인 학살 계획이 세워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 영파에서 동역자 다이어양을 얻어 결혼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생긴 난민들을 돕고자 무료 급식소를 열었으며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한 결과 현지인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테일러가 예기치 않게 지방의 병원을 맡아야 했는데 그들은 3년 동안 닝포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테일러의 능력을 넘어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중국에서의 사역을 중단하고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학 공부를 더 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60년 테일러 부부는 장기 휴가를 받아 영국에 도착하였는데 이 휴가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허드슨과 마리아는 모두 결핵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이 기회에 휴식을 취하고 병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교육을 더 받을 기회도 되었습니다.
테일러는 런던 병원에 들어가 응용화학 과정과 산부인과 과정을 마치고 왕립 외과 대학의 회원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또한 번역 사역도 하였습니다.
그는 영국에 중국인 조수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와 다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닝포 신약전서의 개역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하루에 13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휴가 기간중 그들이 가장 중요한 사역은 선교회를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내지선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테일러는 중국 여러 곳을 여행하며 일하면 일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어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수억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다 매시간 1000명이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국 전역을 복음화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 같이 보였으나, 테일러는 한가지 전략을 세웠습니다.
“만약에 1000명의 복음 전파자를 확보한다면, 그리고 이들 각 사람이 매일 50명 내지 200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3년 이내에 모든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으로 일한 결과 결핵을 앓게되어 영국에 귀국하였고, 여기에서 ‘중국의 영적 수요와 요구’라는 논문으로 중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중국내륙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역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허드슨이 34살의 나이로 중국에 2차 전도여행을 갈때는 지망선교사 16명이 동행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1년만에 항주에 세운 교회당에 모이는 신자들의 숫자가 무려 1천 5백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개척지 양주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맏딸, 막내아들 그리고 헌신적인 동역자를 차례로 잃었으며, 이 와중에 천진대학살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는 성경 여백에다 다음을 같은 기도문을 적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앞으로 1백 명의 선교사들을 추가로 더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로하여금 주님의 큰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그가 기록한 이 기도문이 기독교 신문에 기사화됨으로 영국인들 안에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의 열풍이 일어났습니다. 가까스로 건강이 회복되자 45살 나이로 다시 중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자였습니다.
허드슨은 여러 선교지역에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역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은 온갖 고난과 시련속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 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명을 넘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지방에 이르자 성문 위에서 금빛으로 ‘내륙 은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여러 선교 본부를 방문한 후 그는 이전에 배타적인 지방이었던 호남의 지방도시 ‘장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호남성에서 73살의 나이로 열정적인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허드슨은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고 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감당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