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와 함께했던 ‘어머니’ 세상의 위로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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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와 함께했던 ‘어머니’ 세상의 위로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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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실 (1915∼1989)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 목사와 ‘성령의 땅’ 경남 진해 


최자실 목사는 ‘할렐루야 아줌마’이다. 누구나 그렇게 인식한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를 입고 전도 가방을 든 ‘여종’. 최자실에 대한 이 언어와 이미지는 한국성령운동의 이미지로 계속될 것이다.


그 언어와 이미지는 최자실을 개신교의 인물로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의 완벽한 여종이기만을 바라는 우리의 간절함 때문이다. 그러나 최자실은 한국 근현대여성사의 인물이다.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유교적 관습 속에 태어난 최자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모성의 강인한 힘으로 세상과 맞섰다. 그리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에게 복음만이 살길이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일대를 중심으로 도시빈민사역을 펼쳤던 그는 동역자인 조용기 목사와 함께 세계 최대 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가난한 국가’가 방치했던 ‘빈민 속의 약자 여성’에 대한 상담과 치유, 구제의 손길이 배어 있다. 슬피 울던 여인들의 어머니가 최자실이었다. 그도 삶 속에서 슬피 울던 여인이었다.


백두산 마을서 마적 습격에도 ‘산파 간호’


지난 주말 경남 창원 진해구의 해군진해교회(옛 통제부교회). 6·25전쟁 중인 1950년 11월 세워진 이 교회는 53년 성탄절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 62년 12월 윤보선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을 정도로 군(軍)선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곳이다.


예배당은 마치 목이 긴 학 한 마리가 서 있는 것처럼 우아하다. 교회 주변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어서 빼어난 안식처가 된다. 해방 전 일본인 장교들이 클럽으로 사용하던 목조건물에서 통제부교회가 시작됐다.


53년 무렵 최자실은 이 교회 부인회장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여전도회 회장인 셈이다. 그는 남편 김창기 당시 해군 대위를 따라 6·25전쟁 중 해군관사에 짐을 풀었다. 진해는 최자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생활과 같았다. 사업을 이유로 교회생활에 소홀함으로써 주님의 진노를 샀던 곳이다.


50년대 후반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행한 전국기업체 총람. 이 총람의 금속기계 공업 항목에 ‘대한합동샬를제작소 대표 崔子實(최자실)’이 눈에 띈다. 업체 소재지는 ‘진해시 중앙동1’로 표기돼 있다. 진해 중심지로 지금의 중원로터리 일대다.


“외국에서 수입해 오던 셔틀(베를 짤 때 실을 풀어주는 기구) 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우리 공장은 24시간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됐다. 150명의 직공을 밤낮으로 나누어 철야근무를 시켰다. …경성방직 인천방직 조선방직 대구방직 등에 납품했는데 여기 가도 최 사장, 저기 가도 최 사장 하며 찾았다. 돈 받으러 간 내가 칙사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최자실 저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중)


최자실은 요즘으로 치자면 재벌급 여성 기업인이었다. 이미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성냥공장과 비누공장을 설립해 돈을 벌었던 그는 진해에서도 군부대 매점과 고등어잡이 어선을 운영해 큰돈을 벌었다. 이를 기반으로 방직기기 공장을 세웠고 자가용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수금했다. 억센 여사장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교장에 드나들더니 그를 키도 작고 춤도 못 춘다며 구박했다. 부부는 이때 호적정리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이혼에 들어간다(부부는 훗날 재결합. 김창기는 순복음신학교 졸업 후 개척교회 목사가 된다). 


이때 최자실은 수금하러 가는 차 안에서 노방전도하는 이들을 보며 “열두 살 때 이성봉(1900∼1965·부흥사) 목사님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 영광 돌리기 위해 산다고 배웠는데 지금 나는 통제부교회 부인회장 일도 제대로 못 하며 사업에만 쫓겨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 아닌가” 하고 자책한다. 


최자실은 평북 신의주가 고향으로 한경직 목사가 시무했던 신의주 제2장로교회를 섬기던 기독 신여성이었다. 신의주도립병원 간호학교를 나와 함북 초산의 백두산 길을 오가며 산파를 했다. 마적이 약탈하는 국경지대였다. 그는 어머니의 걱정에 “사람 생명은 마적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달렸다”며 3년이나 근무했다. 마을사람 수십명이 마적단에 죽임당한 것과 총상 입은 부상자를 후송해야 했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 근무를 자원한 것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함도 있었다. 아버지 최덕립은 그가 여섯 살 때 죽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남 1녀를 키워야 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최근 경기도 군포 한세대에서 만난 둘째 딸 김성혜 총장의 회고.


“어머니는 여장부였어요. 반면 아버지는 자상했고요. 어머니는 사업에 물불 안 가릴 정도로 강했어요. 하지만 자신이 주님의 딸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지요. 외할아버지의 부재와 어릴 적 시냇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 등을 통해 슬픔과 죽음을 일찍 알게 되셨답니다. 어머니의 전도 방식은 함께 울어주는 거였어요.”


최자실은 신실한 교회생활을 했고 일본 주오(中央)대 법대를 졸업한 제2장로교회 청년 김창기와 중매 결혼했다. 신의주 세관에 근무하던 엘리트였다.


해방이 되고 38선으로 남북이 갈리자 최자실은 월남을 강행한다. 남편이 먼저 월남, 중앙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최자실은 홀어머니와 젖어머니, 아이 셋을 데리고 소련군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했다. “월남자들을 대상으로 강도질하는 이들을 피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했다.


탈출 후 그는 서울 신당동에 정착해 신당동성결교회를 섬겼다. 부인회장이었다. 한데 전쟁이 발발했다. 해군장교가 된 남편은 이번에도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한강을 건너 청계산 자락에 숨었다. 이 와중에도 산 기도굴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은 그가 3개월간 숨어 기도한 그 기도굴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성냥 비누 섬유공장으로 떼돈… 하루아침에 몰락


진해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갈피를 못 잡는 자의 끝을 보시게 하는 것 같았다. 사업은 번창했으나 헛되고 헛됐다. 큰딸 복자가 경북 김천 용문산 기도원에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앞서 홀어머니는 “세상 사장 말고 천국 사장이 돼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더구나 큰딸 입원 중 자녀 셋이 전기누전으로 모두 죽을 뻔했으나 극적으로 화를 피했다. 사업도 사기와 배신, 제3차 화폐개혁(1953년) 등으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쳤다.


그는 유서를 써놓고 진해역에서 서울로 향했다. 다음 날 서울역에 내린 그는 세검정고개를 넘어 삼각산 골짜기로 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 했다. 극약을 꺼내 마시려는 순간 바람에 날려 실패하고 곧 후회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는 숲을 헤매다 바위굴을 발견하고 들어가 “하나님, 죽여주십시오” 하고 매달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중생(重生·영적으로 새 사람이 됨)을 체험하게 된다. 


삼각산에서 내려온 그는 이성봉 목사의 권유에 따라 서대문 순복음신학교 신학생이 된다. 그 시험장에서 콧날이 오뚝한 한 청년과 같이 시험을 보게 되는데 그가 훗날 사위가 되는 조용기 목사였다.


최자실에게 재물은 풍요로웠으나 광야와 같았던 진해는 그때와 도시의 틀이 큰 변함이 없다. 딸 성혜가 바쁜 엄마를 그리워하며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던 소나무길도 여전했다. 그 자녀들이 다녔던 도천초등학교도 제자리다. 또 “우리 큰딸 좀 살려 달라”며 문을 두드렸던 군 병원장(현재 음식점) 사택도 그 자리에 있다. 진해역도 폐역은 됐으나 형태는 그대로다.


최자실의 신앙을 연구한 조귀남 한세대(선교학) 교수는 “최 목사에게 진해는 고난의 땅이었음에 분명하나 종내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위로자로 보내기 위한 성령님의 이끄심의 땅이 아닌가 한다”며 “이전의 최자실 연구가 대조동 천막교회 이후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중생 체험 이전의 연구를 통해 여성사적 관점이 새롭게 조명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자실 목사, 아버지에 대한 원망 존경·긍지로 바뀐 까닭은


진해 남원로터리 중앙. 김구 선생이 1946년 5월 해안경비대 장병 격려차 방문한 바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땅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느낀다’를 베껴 쓴 비가 자리하고 있다.


최자실의 아버지 최덕립은 늘 일본 순사에게 쫓겼다. 1948년 최자실이 ‘대한민국독립촉진국민회의(독촉)’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됐고 이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김구가 “당신의 아버지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한 분”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독촉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사회단체로 이승만이 의장, 김구가 부의장이었다. 최자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설움이 존경과 긍지로 바뀌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국민일보 

창원=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82066&code=23111111&sid1=c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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