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방식 아닌, 상대방의 언어로 소통해야 사랑받는다
1
최근에 교회에서 만드는 월간지에 ‘가을 편지’ 코너를 만들어, 이 계절에 생각나는 사람에게 독자들이 쓴 편지를 실었다. 그중 노년의 한 여성이 사별한 남편에게 쓰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여보,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해준 것이 마음에 남습니다. 그땐 왜 그리 사랑한다는 말이 어렵던지요…. 나와 살면서 한평생 아이들 키우고 하느라 당신 참 애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받아 정리하던 우리 팀의 편집위원이 편지의 끝에 이런 문장을 넣어 원고를 마무리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말해봅니다. 여보, 사랑합니다.”
편집을 마치고 교정을 보기 전에, 편지를 쓴 분에게 다듬어진 내용을 보냈다. 그런데 의외로 ‘사랑한다’는 내용을 빼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편집위원은 사랑하지만 그 말을 못 한 것이 후회된다고 읽었지만, 그분은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것뿐,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단다.
허…, 그렇다고 굳이 사랑한다는 말을 빼 달라고까지 할 일이 무엇인가 싶었지만, 모두가 보는 책자라서 괜히 부끄러울 수도 있고, 거짓(?)을 쓰기에는 자기 양심이 허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평생을 살고도 사랑하지 않았다니, 아마도 그분은 수고한 남편에게 고마움은 있었지만 ‘사랑’과는 다른 감정이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타인의 인생이지만 안타까웠다.
고인이 된 남편이 어떻게 살았어야, 그 부인은 늦게나마 사랑했다는 말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아 쓸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한동안 떠나질 않았다.
과연 어떤 것이 사랑일까. 사랑한다고 하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사랑받는다는 것은 또 어떤 상태라는 건지 가끔은 멍해질 때가 있다.
사랑한 것 같지만 사랑이 아니었고, 사랑이 아닌 줄 알았는데 사랑인 경우가 더러 있다. 대개 그것은 상대방이 죽은 후나 이별한 뒤에…. 세월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2
사랑이 뭐 별거냐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실함이나 변치 않는 마음, 책임감 등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애틋하게 아끼고 다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느낀다.
남성들 중에는, 내가 온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평생 일했는데 사랑받을 자격이 안 되느냐고 항변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판단은 배우자가 하는 것이라서 아내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애 키우느라 고생하면서 밥해주고, 시댁에도 할 만큼 하고, 때론 바깥 일까지 하면서 자신을 희생했으니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성들 역시 그런 아내를 사랑했다는 말은 주저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고 남녀가 다르다. 완벽한 아내도 남편인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남자는 만족하지 않고, 아무리 능력 있는 남편이라도 아내인 자신을 아끼고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여자는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로 자신에게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랑이나 호의도 상대에게 전달되어야 비로소 인정받는 것이지, 내가 사랑했으니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랑은 상호작용이며 일방통행이 아니다.
부부나 연인이 꼭 죽도록 사랑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보다 책임이나 성실, 의무, 헌신 등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 그렇게 계약관계처럼 연애를 하거나 평생 살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3
사랑의 기준과 언어가 서로 다른 타인을 만족시킬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써도 어떤 판단을 받을지 알 수 없다.
자기 방식이 아닌 상대방의 언어로 소통해야 사랑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인정해도, 내가 만나는 면접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격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에는 여러 감정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긍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종종 긴 세월 동안 생긴 온갖 상처와 지긋지긋함에 갈라서고 싶기도 하지만 차마 불쌍해서 어쩌지 못하고, 서로 딱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산다고 고백하는 노부부들을 본다.
이것이 긍휼이라면 긍휼이다. 어쩌면 나 없이는 껍데기뿐인 사람에 대한 배려 이전에, 배우자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긍휼일지도 모르지만….
긍휼의 시선은 감정의 영역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공의의 눈, 이성의 눈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긍휼을 공의의 방식으로 이루셨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는 상호보완적 요소이다.
사랑하되 공의 안에서 사랑하시고, 공의롭게 심판하시되 사랑을 놓치지 않으신다.
반면에 사람은 무한히 용서하지 못하고, 종종 주관적 공정함이라는 잣대를 꺼낸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나’, ‘이건 말이 안 된다’ 하고 따지다 보면, 사랑보다는 서운함과 회한만 남게 된다.
사람은 공의를 말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나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긍휼이 더욱 넘쳐야 사랑할 수 있다. 주관적 공의의 잣대로 사랑을 판단하면 어떤 배우자나 연인도 빠져나갈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멀리 있지 않은 행복일 것이다.
사랑하지 않았다….
이 말은 아내의 소심한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채워주지 않은 남편에 대한 원망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 부인이 좀 더 긍휼의 마음으로 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남편이 긴 세월을 함께 산 사람에게서조차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외롭게 방치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결말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도 인생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