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6-8 [복음(福音) : 그 날을 향한 시선]-1
[디모데후서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복음(福音) : 그 날을 향한 시선]-1
성경은 인간에 대한 교리와 영혼에 대한 교리,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교리를 다루고 있으며, 독생자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에 관한 것과,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로부터 약 2천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성경의 계시들이 성취 되어져 온 것을 목도했습니다. 이 긴 시간을 목도해 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이 더욱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서가 기록 될 당시의 로마 황제는 신처럼 군림했었습니다. 황제가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한 충성은 반역으로 취급되었고, 형벌 또한 십자가형이나 사자 밥으로 던져지는 극형으로 다스려졌습니다. 그러나 미친 황제 네로가 아무리 핍박을 해도 성도들의 믿음을 꺽을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날’을 바라 본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사랑의 수고가 이어졌고, 그러한 것들이 마침내 믿음의 역사가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믿음의 도전을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난을 당하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고백은 당시 극한 고난에 시달렸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 날’에 대한 교리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 ‘그 날’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살아가는 영적 기대감은 삶을 변화시키고, 가치의 관점을 바꾸어 놓습니다. 기록되는 역사 또한 인간사에 치중 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집중하게 합니다. 시간 역시도 하나님의 때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한 살면서 하게 되는 어떤 선택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로 결론 낸 뒤에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날’을 향한 흔들림 없는 시선 고정은 성경 전체를 특정 짓는 기조(基調)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의 역사는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시도’라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형화된 불변의 만족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꾸만 새 것이 등장하고 다음의 것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인류의 총체적인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문명이 주는 오류와 실패의 범주 역시도 비례적으로 상승합니다.
사람들의 소망이 이 땅의 것을 향해 있고 추구하는 가치가 물을 움켜잡는 것과 같다면, 세상의 진보도 법도 소용없습니다. 살기 좋은 복지 국가에서 이것 저것 누리며 살아도 소용 없습니다. 강건하게 백세 이상을 즐기면서 살아도 소용 없습니다. 다 허무할 뿐입니다. 죽음의 바다 앞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인류는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결론을 내고, 결론에 이어 또 다른 과정의 수순을 밟아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장차 다가올 육신의 죽음을 위해 세상에서의 장례식을 준비하고, 납골당과 수목장 등을 준비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짜 자기 자신인 영혼을 위한 일은 간과합니다. 죽음을 직시 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르고 그 무지가 둘째 사망을 부르는 주된 원인이 된다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어 알게 된다면 그 아는 것은 즉시 형벌로 이어지게 됩니다. 흐름의 시작과 끝을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와 인류사에도 있고, 교회사와 세계사에도 있습니다. 작은 단체에도 있고 산업과 국가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흐름에 휩쓸려 갈 때도 있고, 발맞춰 갈 때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흐름보다 앞서서 갈 때도 있습니다. 흐름이 있다는 것은 방향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방향은 오직 한 쪽으로만 나있습니다. 어느 성격의 흐름이라도 그 방향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그 방향의 끝은 바로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이든, 세상의 종말이든, 종말을 향한 흐름은 멈추지 않습니다.
다행이도 성경은 그 흐름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거치게 되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교리교육 부족과 체계적이지 않은 정통교리의 부족은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게 하거나, 가라지의 언변에 휘말리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리교육을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정통교리는 믿음의 울타리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밑받침 되어야만 견고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주님의 위격에 대한 교리와, 구속 및 구원 등,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일반적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세계관에 대한 교리는 잊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교회에서도 주님의 용서와, 죄 사함의 확신과, 이로 인해 얻게 되는 마음의 평안을 이야기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따른 ‘그 날을 향한 시선이 바라보는 복음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시작입니다. 누구라도 현재를 지나 미래로 가기 위하여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쪼개어 만든 흐름의 단위인, ‘시간’ 여행을 이 창조역사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큰 역사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타락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팍스로마나 시대가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킨 사단의 전술이었다면, 현시대는 정신세계를 미혹하는 전술로 영육 모두를 사욕에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오늘의 패역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운데서도 하늘의 계획과 목적을 두고 역사하시면서 그날에 소망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주고 계십니다.
소망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의 배경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은 타락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개입과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이 후 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에 대한 많은 계시가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계시의 완성자가 바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커다란 구속사의 강줄기가 흘러가는 가운데 인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전환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차매’의 결정체 입니다. 기원전을 기원후로 바꾸어 놓았고, 구원론에 대한 핵심적인 변혁에 이르게 했습니다. ‘
그러므로 이 세상사람 누구라도, 또한 이 세상의 역사 그 어떤 것이라도 ‘B.C 주전과, A.D 주 후’가 붙습니다. 내가 내어난 날도, 그가 태어난 날도 주전 또는 주후 몇 년도로 표기 됩니다. 믿는자들이 태어난 날도 불신자들이 태어난 날도 주전 또는 주후 몇 년도로 표기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주전이거나 주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B.C와 A.D, 즉 주전과 주후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즉 어떤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없는 인생이 없다는 뜻입니다. <계속>
MARANATHA !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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