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심판]-1 현명인목사
[이사야 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복음(福音) : 죽음과 심판]-1
사람은 속에 있는 지식과 경험 등을 끄집어 낸 뒤에 돌출된 노력을 계속합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나은 내일의 가치를 위한 준비때문이기도 합니다. 계획한바 대로 될 거라는 기대감도 한 몫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웬만하면 깨닫게 되고, 허탈감에 빠진 자신의 연약함을 상고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행히 실패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피조물로 먼저 의식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의 심판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죽은 뒤, 영원한 세계와, 언젠가 들어봤던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걱정이 되어지기 시작한다면, 그래서 자기 안에 퇴적층처럼 쌓여있던 모든 악행들이 생각나기 시작한다면, 자신이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져 왔었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실패를 주님 안에서 의식하는 사람들치고 사도바울과 같은 다음의 고백을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7:19-23]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주님께만 소망이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 이 후의 그날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날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죽음이 엄습한 그날과, 그 날 이후를 두려워 합니다. 자기 영혼의 추악한 실상을 안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보게 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일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은 집행 유예의 시간, 곧 시험과 기회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심판의 결과는 무죄와 집행유예와 형벌입니다. 집행유예는 육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시간입니다. 무죄와 형벌집행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갈리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요,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성경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윤회설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두 번째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불교 교리 가운데 하나인 중생은 죽은 뒤 그 업(業)에 따라 육도(六道)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것을 천명한 사상인 윤회설(輪廻說)입니다. 여기서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윤회설은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세상을 향한 어리석은 인간들의 미친 몸부림일 뿐만 아니라 헛된 망상에서 나온, 망언일 뿐입니다.
인간은 단 한번 뿐인 짧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원한 운명과 상태를 결정짓게 된다고 성경 66권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들어서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의지하게 되어 자기 영혼의 실상과 하나님을 보게 된 사람은 그나마 복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범주에 들어온 그들 가운데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을 걷어차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격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인가? 나는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이 두렵다.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죽음을 미루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나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기회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더 주어진다 해도 이제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의 과거의 죄가 크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훼방했으니, 나는 그 분의 사랑을 요구할 수가 없다. 내게 남은 건 심판과 영원형벌 뿐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 안의 자아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주님보다 자아가 더 강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완전히 내려 놓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교만의 한 양상입니다.
어느 지점에서든 구원의 어떤 부분을 자신 스스로가 책임지려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짓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짓입니다. 자신의 공로와 노력과 수고에 기대는 사람의 결과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상태에 있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습니다. 심히 불행하고 비참한 교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피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일종의 놀라운 그림이나 이론이나 사상으로 믿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그 분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딤후 1:12)“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것이 믿음의 의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의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고 확신한다면 나의 전인격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를 그 분의 통제 안에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내 뜻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있는 것이며, 내 계획은 없고 하나님의 계획만 있는 것입니다. '크로노스' 나의 시간은 없고, '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간만 있는 것입니다. 내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학식도 없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분을 경외하는 지혜만 있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 전체가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이러한 결단이 행함으로 표출되는 것이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거룩한 양상입니다. 그는 자신이 육체 가운데 사는 의미를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자가, 지금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당신이길 바랍니다. <계속>
MARANATHA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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