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1 현명인목사
[마태복음 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전 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부활신앙]-1
기독교는 부활신앙을 절대소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예수님과 같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우리의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강론하며 가르치는 주요 주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의 열매를 맺으려 하셨던 목적과 같고, 그래서 교회가 존재하게 된 이유와 같습니다. 즉 교회는 부활 신앙을 소망하는 믿음의 열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죄를 가진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 되어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인자(人子)로 오신 주님도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한 번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써의 죽음이었습니다(막 10:45).
셋째, ‘확고한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게서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 확증이 바로 부활사건 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비로소 최고의 신앙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자라면 '십자가 은혜의 복음'에서 '생명 부활의 복음'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넘어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는 이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을 때 성도들이 심한 박해를 받은 까닭은, 자기들이 십자가에서 처형시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전했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해석 문제가 아니라 부활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게한 그들 입장에 있어서, 이미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히 못박혀 죽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음이 사실인 그것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그 죽음에 ‘대속(代贖)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또 그렇게 해석을 한다고해도 그들에게는 일단 예수의 죽음까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부활했다는 예수 추종자들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난무한 아전인수격 해석'이든, '앞 뒤 가리지 않는 외침'이든, 예수를 잔인하게 죽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관대하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저 죽은것 까지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체포 소식만으로도 두려워하였고 자기들에게도 피해가 올까 싶어 은신하고 있었던 제자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너희가 죽여서 무덤에 장사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 외침은, (1)명백한 유언비어였고, (2)악의에 찬 이단 괴수들의 민심 선동이었고, (3)예수를 재판한 유대사회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을 향한 도전이었고, (4)신성모독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정점으로하는 그들 사회의 최고 수준의 율법학자들 70명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백성의 존경을 받는, ‘감히 경시할 수 없는 존귀한 어른들’이었고, ‘깊게 박혀 빠지지 않는 돌과 같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 이었습니다.
산헤드린 법정은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유포하는 예수의 악랄한 제자들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포했고 법정에 세웠습니다. 수제자로 꼽히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사람들이 놀라워 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잔뜩 겁먹고 예수를 부인하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법정에 붙잡혀와 있으면서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당당하게 증언하는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법정은 민심을 고려해 일단 그들을 석방하면서 다시는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엄격한 법정의 경고는 제자들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맞섰습니다.
이 같은 담대한 용기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 때문이었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40일 동안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사도행전 1장 3절에서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또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환상을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한두 번 그냥 나타나신게 아니라 여러번 자주 나타나셨습니다. 마치 아예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생명이 그냥 그대로 주욱 이어져온 것 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관계가 지속되었었다는 것입니다.
이쯤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부활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한 두 번의 출현이라면 환상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너무도 뚜렸하고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보다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지엄한 법정이라고해서 어찌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기독교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무덤에서 부활로,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활생명의 신앙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최고의 신앙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넘어 영원한 부활생명으로 나아가는 믿음'인 것입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름다운열매맺는 좋은나무교회
<아둘람복음공동체 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