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권능목사 "예수천당 불신지옥"
광인, 최권능목사
"죄 가운데 살다가 죽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구원 얻으라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시오."
"예수 믿으려도 당신같이 될까 봐 무서워 못 믿겠소."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에잇 퉤!"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행색이 얼핏 보아서는 거지와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최권능 목사를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불신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도 최권능 목사와 그의 전도 방법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서슴지 않고 미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회에서 열정이 넘치는 의견을 제시하면 그것이 성경과 교회 앞에 신실한 충언일지라도 많은 이들의 조소 속에 묻혀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의 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감사했다.
'예수에 미친 사람,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면류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는 자신이 받기에 너무나도 과분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예수에 미친 자.'
매를 때리면 담요에서 먼지가 나듯 그에게서는 '예수'가 나왔다. 그는 예수의 향기로 가득했고,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 그에게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는 예수로 인해 핍박받았고, 예수로 인해 기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발이 된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다. 야간 연습 중이던 일본군 소속 사병 한 병이 실종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일본군은 중국군을 공격했고 이때 최권능 목사의 셋째 아들 광화가 중국인으로 오인 받아 일본군인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지만 최권능 목사님은 시종일관 옷는 얼굴이었습니다.
"조선은 넓은 감옥이오. 이 감옥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천국에 갔는데 내가 슬퍼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소. 이 세상은 두고 보시오. 하나님의 것이오. 참으로 예수를 믿으면 항상 기뻐할 일뿐인데요"
"항상 기뻐하라!"
최권능 목사가 '예수 천당!'만큼 많이 전한 말씀이다. 실로 예수에 미쳤던 최권능 목사의 전 삶은 에수에 대한 사랑으로 불이 붙어 있었다. 그가 전도를 하며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일화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밤에 동네 불량배들이 막대기와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떼를 지어 와서 죽을 만큼 때리고, 기절한 최권능 목사를 죽은 잘 알고 동네 어귀에 내다 버린 적도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누워있던 최권능 목사의 귓가에 '일어나라'는 음성이 들려 벌떡 일어났더니 아픈 데도 없고 맞은 상처도 없었다.
만주에서는 마적들에게 전도하다 매를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고, 강퍅한 자들이 최 목사의 다리를 꺾고 허리를 상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귀신 당직을 불살랐다고 부지깽이를 가지고 나와 최 목사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 심한 상처를 입은 일도 있었다.
언제나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인해 상함을 받은 최권능 목사를 기적처럼 소생시켜 주셨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죽고자 하고, 예수를 위해서 살고자 함으로 예수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섬기는 종, 최권능 목사
최권능 목사는 무엇이든지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의 사는 형편이 넉넉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거했던 오막살이집에는 나무와 쌀이 떨어지는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호주머니를 털어 무엇이든지 베풀려고 하였다.
나눠 줄 것이 없으면 그의 마음이라고 나눠주었다. 최권능 목사를 찾아온 사람들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의 따뜻하고 다정한 심성에 감탄을 하며 집을 나서곤 하였다.
특히 그는 해학과 풍자에 기발했다. 그 해학은 단지 사람을 웃기거나 우습게 만들기 위한 저급한 농담이 아니라, 슬픔과 근심 가운데 있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풍자는 골수를 쪼개고 들어가 강한 여운을 남기는 말로 가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은 최권능 목사, 그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능력의 전도자, 최권능 목사
마땅히 사랑받을 만한 자,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자, 역정을 내지 않는 자, 인격을 모독하지 않는 자, 철면피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 자, 솔직한 자, 공손한 자, 미안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에 인색하지 않는 자, 남을 욕하지 않는 자, 아첨하고 게으른 것을 싫어하는 자, 최권능 목사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다.
하지만 이러한 성품의 최권능 목사도 '회개하라'고 외칠 때의 위엄은 사뭇 무서움이 느껴질 정도였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는 교회가 말씀에서 벗어나려 할 때면 비분강개한 말을 서슴지 않고 토해내는 불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언중에 독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나는 예수를 전하는 기계로 족하다."
전 생명을 바쳐 구원을 위한 백절불굴의 소리를 내는 하나님의 확성기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명하여 불렀고, 주님이 그에게 전도의 사명을 심어주셨으며, 그의 사역 가운데는 언제나 성령님이 함께 동행하셨다.
그의 별명처럼 그가 권능의 사역자였음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 1907년조는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최봉석이 조사로 피임, 본읍에 내왕하여 열심 전도할새 이적이 수현이라
"예수 천당!"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외침을 떠올리게 하는 이 부르짖음은 어둠에 놓인 이 땅을 밝히는 빛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정치인도 아니었다. 위대한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의 외침은 서울에 있는 조선 총독부를 향해,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벌판을 향해, 현해탄을 건너서 아시아 천지를 마음대로 먹어 치우려고 이빨을 갈고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향해 뻗어나갔고, 불의한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억눌린 자의 심령을 위로하는 울림이었다.
또한 그의 외침은 개화를 타고 밀어닥치는 도덕적 부패를 막아내는 성령의 방패였다. 덮쳐오는 마귀의 해일을 향해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힘입어 외치는 거룩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가 세운 교회 수가 80여 개.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들이 수천, 수만에 달하니 그는 그대로 전도의 큰 불덩어리였다.
최권능 목사의 발걸음이 닿는 곳은 어디든 그의 사역지였고, 그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교인이었던 것이다. 하늘과 땅, 그게 그대로 주님과 만나는 예배의 처소가 되었다. 그는 노상에서 어느 목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가장 힘 있고 가장 권세 있는 기상천외한 부흥회를 날마다 인도했고, 그의 호흡이 다할 때까지 전했다. 자기의 입이 그대로 집회의 종소리였고, 그게 그대로 설교의 요지였다.
또한 그는 분명 명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예수 믿고 살 텐가, 안 믿고 지옥 갈 텐가! 이 불쌍한 인생들아..."
믿음의 선배, 최권능 목사
최권능 목사가 이렇게 애절하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부르짖던 그 시기의 우리 한국은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였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고 세계 전체가 불안의 심연에서 허덕이던 시기였다. 따라서 최권능 목사가 그 어둠 속을 비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서광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의 시대적 상황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 볼 때, 영적으로 더욱 어두워져 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상은 더욱 악해져 가는데 지금 우리에게 최권능 목사와 같은 복음의 용사가 없음은 어찌된 일인가!
백여 년 전 한국교회의 부흥은 단지 기도와 회개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배웠고, 그들은 말씀을 전했다. 한국교회 초대교인들에게 전도는 연중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그들의 삶이었다. 전도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의 헌신을 통해 뒷받침 되었던 것이다.
최권능 목사의 순교
형무소에서 40일간 금식을 강행하닥 병으로 쓰러지자 병보석이 받아들였다. 일을 앞둔 1944년 4월 15일, 오후 12시 40분. 평소에 그를 아끼고 따르던 교우들과 부인, 자녀들이 최권능 목사의 병실에 모여 있었다.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그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찬송이 끝남과 함께 미소를 남기고 최 목사는 운명하였다. 그의 나이 75세였고, 이날은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 4일후였다.
해방 후 1946년 봄, 산정현교회는 그의 순교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