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의 위로
주님과 동행의 위로
1. 동행은 주님과 함께 걸어간다는 의미이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Genesis 5:22, KJV)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같이 걸어간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에녹은 그 시대의 많은 대중들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경건한 생활로 걸어갔던 사람입니다.
가장 방탕한 시대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굳게 견디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을 살아냈던 생활의 본보기를 우리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므두셀라”라는 뜻이 ‘창 던지는 자’ ‘활 쏘는 자’로 종말을 예언하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는 종말, 신앙의 끝이 있으므로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5)
And what concord hath Christ with Belial? or what part hath he that believeth with an infidel? (2 Corinthians 6:15, KJV)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멍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와 벨리알(우상)이 같이 어찌 조화 되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겨리의 멍에를 메고 같이 걸어 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주님을 만났으면 이제 함께 걸어 가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내 힘을 의지하고 내 생각대로 간다면 주님과 함께 걸어 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겨리 하였다면 주님이 함께 견인하여 가는 것입니다.
함께 멘 멍에는 벗을 수도 없습니다.
함께 메고 목적지를 향하여 같이 걸어 가기에 같이 가면서 주님께 말씀을 듣고 겸손을 배우고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영적인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신비와 감각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아4:9)
Thou hast ravished my heart, my sister, my spouse; thou hast ravished my heart with one of thine eyes, with one chain of thy neck. (Song of Songs 4:9, KJV)
아가서 4장은 술람미 여인(신부)이 솔로몬 왕(남편 그리스도)를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말씀하는데 이는 신부가 신랑과 함께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신랑의 마음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신부가 목에 메며 떠나지 않고 걸고 있던 목걸이 입니다.
솔로몬은 목걸이를 하나님의 교훈을 줄에 꿰어 놓은 구슬과 같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합니다.
잠언 1:7,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에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 사슬이라
주님의 복음의 불에 단련한 은과 같은 말씀을 금 사슬에 꿰어 교훈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2.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는 것은 썩어질 성품이 죽는 것이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r God took him. (Genesis 5:24, KJV)
주님에 대한 신앙은 죽음에 대해서도 위로를 받습니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에서 부활에 대한 가시적인 모형입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멍에를 멘 자들은 이 땅의 멸망될 생명에 소망을 제한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분명 영과 육이 분리 되는 것이지만 죽음이 언제나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위선된 연합은 그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되는 것은 썩어질 성품이 죽는 것입니다.
그 것이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이 갖는 신앙생활입니다.
에녹이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2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Having therefore these promises, dearly beloved, let us cleanse ourselves from all filthiness of the flesh and spirit, perfecting holiness in the fear of God. (2 Corinthians 7:1, KJV)
주님은 고린도 교회의 회개를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과 연합한 교린도 교회는 함께 멍에를 멘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신 성전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상에서 멀리하고 부활하는 위로의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구원 받을 자들의 생활은 마지막 날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점진적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말씀의 설계도를 가지고 건축하는 것(세워 가는 것) 입니다.
그 것을 추구하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부활의 모습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내 자아를 날마다 깨뜨리고 변화를 추구할 때 부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And the very God of peace sanctify you wholly; and I pray God your whole spirit and soul and body be preserved blameless unto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1 Thessalonians 5:23, KJV)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다가 죽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주님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과 그 부활을 위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절제됨 삶으로 점진적 성화를 이루어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놓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한 것입니다.
멍에를 주님과 함께 메고 걸어가며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 속에 주님의 위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영상으로 보기 https://youtu.be/CgyKKoE1Cr8
글, 박진생 목사
성장하는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