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목회 이야기 '푸른언덕' 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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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목회 이야기 '푸른언덕' 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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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던 시절에 박흥규목사님이 제작하던 '푸른언덕'에 실은 글이다.

70년대 우리 가족은 서울의 변두리 꼬방동네에 살았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어 흔적도 살아져 버린 사당동 국립묘지 뒷산이었는데 양동, 도동에서 철거당한 사람들이 몰려와 일군 하꼬방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예전에 한강의 배가 머무는 곳이라 하여 ‘배나무골’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와 셋집 생활에 전전하던 것이 지겨웠던지 보증금을 빼고 여기 저기서 돈을 꾸어 내 집을 마련했다. 이사하는 날, 내 집으로 간다는 설레임에 이삿짐을 실은 리어카를 밀며 언덕을 오를 때도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여 샀다는 집에 가보니 아직 주인이 집을 다 비우지 않았고 집주인은 판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판자집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72년 새해는 시작되었다.그후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적응을 잘하는 성격 탓인지 쉽게 익숙해졌다. 매일같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 두 통씩 물을 져다 나르는 일, 된장 장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하여 나이 어린 동생 봐주는 일, 동네 아이들과 편을 갈라 전쟁놀이 하는 일, 개구장이의 한 해는 빨리 지나갔고 72년 성탄이 되었다.

개척한지 얼마 안되는 교회로 몇몇 친구들과 교회 문턱을 밟은 것이 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새벽송을 돌았는데 뭔지 모르지만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그날 배운 “기쁘다 구주오셨네”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교회에서 마련한 작은 선물을 나누어 주는 기쁨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당시 유신헌법을 강제로 통과시킨 박통은 내게 있어서는 위대한 영도자의 모습(?)이었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당시 꼬방동네의 골목 골목에 나붙은 신동우씨의 그림이었다.


‘대망의 80년대,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라고 쓴 글귀에 농촌의 농부가 트렉터를 타고 원색 지붕에 T.V 안테나가 달린 농가 주택에는 자가용이 한 대 놓인 그림이었다. 그것을 보는 나는 어서 80년이 오면 좋겠다는 꿈어 부풀어 있었고, 왜 아버지가 농촌을 떠나 이런 동네에 와서 살까? 한편 원망을 했었다. 그러나 대망의 80년이 오기도 전에 우리 가족은 철거를 당해서 뿔뿔히 헤어져 살아야 했다.

오늘 나는 아버지가 떠났던 농촌에 와 있다. 왜 아버지가 이 농촌에서 떠났는가 하는 이유를 절실히 몸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72년 성탄절에 밟았던 교회의 문턱을 이젠 내가 문턱을 밟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으며 서있다. 100억불 수출은 이루어졌고, 1000불 소득이 넘어선 것도 오랜 일이지만 T.V 안테나와 원색의 지붕도 사실이지만, 어떤 집에는 자가용 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꼬방동네를 찾아야 하는 이농민과 철거민, 농촌을 떠나는 농민의 행렬은 계속 되고 있다.


올해 우리 교회는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30호의 마을인지라 새벽송을 한 시간도 안되어 다 돌았는데 올해는 100호인지라 일찍부터 새벽송 돌 채비를 서둘렀다. 새로 교회에 나온 청소년들과 마을 교회를 찾아온 이적한 교인들, 그리고 5년 전부터 함께 교회를 일구어 온 식구들이 한테 어우러져서 새벽송 돌 채비를 서둘렀다. 예수 탄생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추운 칼바람을 뚫고 전 교인이 나섰다. 손에는 20년전 그 때의 나누어 주는 기쁨을 재현하려고 만든 수건 한장과 과봉을 담기 위한 자루를 들고 씩씩하게 나선 것이다. 믿는 가정, 믿지 않는 가정 구분하지 않고 반겨 맞이하는 집, 문전박대하는 집 가리지 않고 한 집도 빠짐없이 기쁜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나선 것이다. 교인들은 이적한 교인이나 기존 교인이나 구분없이 한테 어우러져 마을의 골목을 누볐다.


자정에 시작한 새벽송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모두들 피로하지만 진한 기쁨이 얼굴에 넘쳤다. 어미, 아비없이 할머니 손에 자란 태광이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집사님, 나누어 주는 것 참 좋네요”하고 말하고 불교를 믿는 집에서 미리 준비한 봉투를 받고는 “참 놀라운 일이예요”라고 외치는 유집사의 외침은 성탄절의 새벽을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 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러한 기쁨이 있는한 아무리 떠나는 농촌일지라도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 교회가 나눔의 기쁨으로 충만했을 때 그리고 이것이 우리 마을로 퍼져 나갈 때 여기 저기서 얻어 터져서 지친 농심을 싸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푼 생각에 밝아오는 94년을 소망해 본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해석했다. 진정 인간은 끊임없는 도전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응전 가운데 살아간다. 오늘의 위기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다. 지금 내가 선 농촌이 바로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 위기를 지혜롭게 이겨나가야 한다. 피하거나 도망하는 자는 낙오자가 되고 말뿐이다. 그래, 새벽이 와도 깨어있지 못하면 맞이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우리를 내놓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 박통같은 영도자의 허풍서니 없고, 비록 내일 꼬방동네를 찾아 나서야 할 지라도 깨어있는 자는 새벽을 볼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응전의 지혜를 모으며 94년 갑술년을 맞이하자. 위기 앞에 그것을 이기려는 농심의 힘을 모은 새로운 출발, 자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바로 잡고 신발끈을 단단히 매자.


예산, 효림교회 문병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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