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네 가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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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네 가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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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네 가지 설교


복음적인 성경신학은 오늘날 교회에 주어진 큰 복이다. 이는 ‘도덕주의’ 설교의 조류를 상당히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번영복음’ 같은 이 시대 최악의 신학적 위협과 싸울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사역자들이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을 가르쳐 온 것은 사실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예로 신학대학원생이던 시절, 나는 성경신학에 흠뻑 빠진 나머지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들어맞는지’에 온 관심을 집중했다. 당연히 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도덕적 교훈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러한 실수는 내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방식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은 성경의 메시지를 왜곡함으로써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해를 입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 건전하지 못한 성경신학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곡된 성경신학이 낳는 설교는 어떤 모습일까?


1. 도덕적 권면을 배제한 설교


성경이 대적하는 것은 도덕주의이지 도덕 자체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둘을 혼동하는 설교자를 여럿 보았다. 바울 역시 도덕적인 행위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6:13–14 참조), 윤리적 권면을 나열하는 설교에 곧장 안색이 변하는 목사나 신학생들이 많다.


‘도덕주의’를 지양하고 참 복음을 강조하려는 여러 목사들의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구약 성취의 극치인 예수님을 향한 올바른 순종은 곧 회중에게 적절한 윤리적 권면을 전하는 것이다. 일부 목사들, 특히 젊은 목사들은 이를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설교할 때일지라도 율법을 적합하게 가르치는 것은(딤전 1:8) 성경적이며 또한 필수적인 행보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 언약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르시는가에 대해 설교할 때, 우리는 성도들이 왕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이끌어야 한다. 또한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설교할 때는 성도들이 그분의 희생을 신뢰하도록 촉구해야 하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신 18:15)을 설명한다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선포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이 참된 성전이심을 설교할 때, 우리는 회중에게 신실한 제자도와 권징을 통하여 그 성전의 순결을 지킬 의무가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이신 예수님에 대해 설교할 때마다 “우상을 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포르노를 탐하지 마십시오.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남의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예수님이 구약의 모형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를 설교할 때에 우리는 메시아가 자신의 백성을 그 성취에 어떻게 참여시키시는지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나 자신도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예수님이 구약의 모형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교하는 반면,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실로 너무나 멋진 분이지만, 만약 그분이 나와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다면 더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게끔 마무리를 지은 적이 참으로 많다. 물론 구약의 모든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속삭인다는 사실, 다시 말해 구약에 나온 모든 약속과 인물이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됨을 발견하고 설명하는 것은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참되고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성전이지만, 그의 백성들 역시 이와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 받았다(고전 3:16). 예수님은 진실하고 더 나은 이스라엘일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의 공동체로 들어오도록 허락하고 이끄시는 분이다(갈 6:16).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심으로써 구약의 부활 모형을 성취하셨지만(고전 15:1–3), 그분의 부활은 장차 다가올 것의 첫 열매이자 우리가 경험할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우리의 오늘을 붙잡아 주는 소망이다(고전 15:58).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분명 칭찬 받아 마땅하다. 나 역시 도덕주의에 빠진 설교를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러한 설교가 초래하는 영적 위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덕 명령을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잘못된 태도이다. 나는 마가복음 2장에서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신 후에도, 그 중풍병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2. 성경 인물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찾지 않는 설교


목사들이 청소년을 향해 “다니엘을 닮으세요”라거나 “요셉처럼 성적 유혹을 물리치세요”라고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 다윗, 요나단, 요시야, 바울, 심지어 예수님처럼 되라고 권면하는 설교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에는 이와 같은 ‘도덕주의’를 비난했지만, 수년이 지난 후부터 그런 태도를 멈추었다. 각 본문을 성경 전체의 맥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사의 절정에 비추어 읽음으로써 모든 상황과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안에 계시된 주님의 은혜를 증거한다는 것도 지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인물들처럼 되어라’ 또는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히 12:16). 바울은 광야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악행에 대해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며(고전 10:6; 10:11 참조), 야고보도 신자들에게 욥과 엘리야 같은 선지자를 닮으라고 격려한다(약 5:10–18).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조언한다(고전 11:1).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이를 듣는 자들에게 그 비유 속 인물을 본받으라고 가르치신다(마 7:24–27).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명령하신다. 이는 다시 말해 “가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는 뜻이다.  


물론 성경의 인물들을 도덕적인 모범으로만 한정하는 설교는 비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삶으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전혀 끌어내지 못하는 설교 역시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성경의 각 이야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정점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어야 함은 물론, 이와 동시에 성경 인물들로부터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 내야 한다. 


설교는 무엇보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된 마음을 성취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명령을 힘써 지키도록 지속적인 권면을 받아야 한다(마 28:20). 성경 속 도덕적 모본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순종을 배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다. 다니엘 3장을 살펴 보라. 우상에 굴복한 군중 앞에 당당하게 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배트맨 비긴스’(Batman Begins​)에서 브루스 웨인(Bruce Wayne)이 말했듯이, “사람들을 무관심 밖으로 끌어내려면 드라마틱한 모본들이 필요하다.”


3. 매주 비슷한 설교


구속사적 설교를 주로 하는 목회자들은 매주 비슷한 설교를 준비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주어진 본문의 윤곽을 따라 원고를 작성하는 대신, 자신의 성경신학적 확신이 너무나 큰 나머지 설교문마저 그 확신으로 구성하고 채우며 결론짓는다. 이로 인해 그들은 “예수께서 구약의 X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보십시오”라는 식의 유사한 설교를 매주 되풀이하고 만다. 


데렉 토마스(Derek Thomas)가 지적했듯이 구속사적 설교는 처음에는 ‘멋있게’ 들릴 수 있지만, 만약 그러한 접근법만 고집한다면 당신은 결말이 뻔한 설교만 하게 될 것이다. 


4. ‘나무’가 아닌 ‘숲’만 바라보는 설교 


구속사적 설교의 마지막 문제는 설교 본문을 자세히 풀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본문의 뜻을 자세히 해석하기보다는 그저 큰 성경신학적 주제(예: 성전, 제사장, 왕, 율법, 안식일 등)를 찾아낸 후 그 주제에 초점을 한정하여 성경의 거대 담론만 다루기 때문에 발생한다. 안타깝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가장 기본적인 설교학적 질문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무시하는 태도이다. 예수님께 이르는 우리의 성경신학적 경로는 결국 본문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최고의 수식어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거저 주시는 그 은혜를 전하는 것이 설교의 궁극적 목적임을 가르치는 강의, 책, 글들은 복음주의 설교를 풍성케 한다. 하지만 설교 앞에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수식어는 ‘강해’이다. 


왜일까? 신실한 설교는 본문을 강해하고, 신실한 강해는 본문의 문학적, 역사적, 언약적 그리고 정경적인 문맥에 이르는 모든 것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Ways Bad Biblical Theology Warps Sermons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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