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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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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이 지난 일이지만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2002년 월드컵을 떠올리면 단 몇 분 만에 가슴속이 뜨거운 감동으로 물들여진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온 국민을 축구 사랑에 빠지게 한 주역들, 그중에서도 침착하고 영리한 수비 플레이로 ‘초롱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이영표 선수의 활약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해 ‘이영표 해설위원’으로 더 많이 불리지만, 여전히 ‘이영표 선수’로 불리기 원하는 그는 영원한 우리들의 국가대표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 국가대표로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주의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더 그 빛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워낙 바쁜 일정에 쫓기는 만큼 만남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 오래 기다린 만큼 소중하고 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 시간을 함께 나눈다.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하셨어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지금은 러시아 월드컵 중계와 그와 관련된 방송 준비에 집중하고 있어요. 거처를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완전히 이전할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삭스업’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있고요. 최근에 「생각이 내가 된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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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바쁘시네요. 삭스업에 관해서는 다시 여쭙고요. 일단 책 출간에 대해 여쭐게요.

출판 계획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몇 년 동안 손을 놓고 있다가 더 이상 시간을 끌면 기억이 희미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제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하신 증거들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모든 집회에 다 갈 수 없으니까 책으로 엮어 전하면 좋잖아요. 특히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서 전하면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저를 포함해서요. 심지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가’라는 의문까지 들기도 하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때 신앙에 대한 허무함이나 절망감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뒤집어 보면 하나님도 섭섭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잖아요. 바람, 햇빛, 공기, 호흡, 음식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까지 주시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날마다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응답이 없어서 상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가 어떤 감동도, 반응도 없다면 상실감을 느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매 순간 초대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한 성찰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일상에서 하나님을 초대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어요.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은 없나요?

저는 신비주의를 경계하지만, 그보다 더 경계하는 건 날마다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감각이에요. 이 책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시며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말하는 책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다면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잠깐, 기쁠 때 잠깐, 주일날 잠깐 찾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전한 우리가 잠시 잠깐씩 하나님을 찾는 것만으로 영적 갈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곳에 하나님을 날마다 초대하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태도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내게 되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나요?

질서라는 것은 뭘까, 규칙이라는 건, 또 자유라는 것은? 그런 다양한 신앙적 고민과 담론들을 나누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동성애는 뭘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언급하면서 ‘시기, 질투, 자만, 게으름’을 동시에 언급하거든요(로마서 6장).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비판하고 규탄하면서, 내 안에 있는 질투, 시기, 탐욕, 욕심에 대해서는 침묵한단 말이에요. 동성애는 분명하게 죄지만, 우리는 동성애가 죄라고 이야기하는 만큼 우리 안에 있는 시기, 질투도 죄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제가 밴쿠버에서 청년 모임을 갖는데, 어느 날 모인 20명 중에 10명은 동성애가 죄가 아니고 10명은 죄라고 이야기했어요. 전부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에요. 죄가 아니라고 한 청년들은 ‘친구가 동성애자인데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얼마나 성품이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런데 동성애가 죄라고 하는 청년들은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을 못해요. 토론이 끝난 뒤에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것으로 분위기가 흘렀어요. 뒷머리를 탁 맞은 것 같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천 청년들이 올바른 판단과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신학과 인문학, 신권과 인권의 문제 가운데서 분별의 어려움을 겪기 쉽죠. 

인간 중심, 휴머니즘의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는데, 내 생각이나 의견, 자의적 관점, 가치관이 그 기준이 될 때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의 측면에서 보면 청년들이 하는 얘기도 틀리지는 않겠죠. 그러나 ‘인간이 생각하는 인권이나 정의가 올바른가?’라고 물었을 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요.


책에서 이런 물음을 던졌어요. ‘과연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선이 진짜 선이냐?

예를 들어,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출구 구간만 꽉 막혀 있다고 합시다. 40분 정도 기다려서 겨우 출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뻥 뚫린 고속도로를 3분 만에 달려온 어떤 차가 내 앞을 끼어들려고 해요. 그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선일까요? 끼워주는 게 선일까요? 안 끼워주는 게 선일까요?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양보하는 게 선이에요. 그런데 내가 양보를 하는 동시에, 내 뒤의 차들에게는 악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선을 행하기 위해서 1백 대를 끼워준다고 해요. 내 뒤에 줄을 선 차들에게는 계속 악을 행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선이라고 판단한 행동이 진짜 선일까요?


인간적인 판단으로 저지르기 쉬운 오류네요.

하나 더 예를 들면, 영국이나 캐나다에서는 거리에서 홈리스들이 돈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집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니 돈을 달라고 하면 줘야 해요, 말아야 해요? 당연히 돈을 주는 게 선이겠죠. 그런데 내가 준 돈으로 마약을 해서 마약중독자가 된다면 내가 한 행동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이렇게 인간이 판단한 선이라는 것에는 곳곳에 약점이 있어요. 그래서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서 선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하는 거죠. 오늘날 많은 선진국 청년들이 선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두고 있어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죠.  

실에 매달린 추는 전 세계 어디에 갖다 놔도 정확하게 지구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 추가 향하는 곳을 기준으로 삼아 건물을 세우죠. 그런데 그 추가 왜곡되어 있다면 건물은 무조건 넘어집니다. 추가 지구의 중심을 향해서 정확하게 늘어뜨려 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중심을 정확하게 하나님 말씀으로 삼을 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가치관이 잘못된 기준에 맞춰져 있고, 인간의 선이 절대 선이라고 착각하는 오류가 팽배해진 것이 안타까워, 이 책을 통해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내가 된다’라는 책 제목처럼 하나님이라는 기준 안에서 바른 생각을 할 때 바른 행동이 나오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대상이 청년이라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고민과 의문이 많으신 편이죠? 

의심이 많죠. 하하. 궁금한 게 너무 많고 의심이 많아서 신앙에 대한 질문을 여기저기 좀 많이 하고 다녔어요. 영성이 뛰어나다는 목사님들 만나면 까다로운 질문을 무차별적으로 하고 그랬죠.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도 캐묻고…. 그런 질문 중에는 몇 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었어요.


특히 어떤 질문?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라든가…. 또 성경에는 앞뒤 맥락이 다른 장면이 많이 나오잖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는 표를 받게 되잖아요. 가인과 아벨만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의 존재가 불쑥 등장하는 게 이상했어요. 성경에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양옆에 두 강도가 같이 매달렸는데, 어디서는 둘 다 저주했다고 나오고 어디서는 한 명이 구원받았다고 나오고…. 처음에는 너무 헷갈렸어요. 성경이 왜 안 맞지? 성경의 내용이 왜 서로 부딪치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누군가 해결해 주지 않으면 고민하면서 혼자 의심을 쌓아 온 거죠.


답을 좀 찾으셨어요?

시간이 흐른 뒤에 제가 잘못 알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자가 기록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한 저자는 강도가 예수님을 비난했던 장면이 마음속에 남아 그걸 기록한 것이고, 다른 한 저자는 처음에 두 강도가 다 예수님을 비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님을 인정한 장면에 마음이 움직여 그걸 기록한 거죠. 즉, 한 저자는 처음에 비난했던 것에 포커스를 맞춘 거고, 다른 저자는 비난했다가 회심한 것에 포커스를 맞춘 겁니다. 근데 그때는 제가 신학적 지식이 없으니까 이런 관점의 차이를 이해 못 했던 거죠. 아무튼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믿음이 단단해지고, 비로소 내가 이해하지 못 하는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내가 안 믿어지는 건 나의 문제지 하나님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올바른 답을 찾으신 거네요.

언젠가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어요.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으로 죽어 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을 게 없어서 가난과 기아로 죽어 가는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두시는 건가, 정말 공평의 하나님이 맞으시는 건가에 대해서요.

어느 날 잡지를 읽는데 ‘전 세계에서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루에 1백 원씩만 내면 전 세계 모든 기아들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 기사를 읽는데,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하는 내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불공평해진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충분하게 주셨던 겁니다. 

그 깨달음이 있기 전에 저는 공평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어요. 빵이 3개 있고 배고픈 아이가 3명 있으면 한 명에게 하나씩 주는 거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공평은 저랑 달랐어요. 하나님은 한 아이에게 3개를 주십니다. 우리 눈에는 불공평해 보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고 ‘나누라고’ 말씀하세요.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이죠. 한 사람한테 하나씩 주면 서로 사랑을 나눌 필요가 없어져요. 내 거 내가 먹고 끝이에요. 3명이 배고픈데 빵 3개가 한 사람한테 갔을 때, 비로소 사랑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음식이나 옷이 부족하지 않아요. 넘쳐흐르죠. 그런데 제대로 분배가 되지 않고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빵 3개를 갖고 있는 내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인 겁니다. 나는 여태까지 하나님 때문에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바로 나 때문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됐습니다.


삭스업도 그런 취지에서 시작한 건가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먹고, 자고, 입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니까 희망이 있어야 해요. 먹는 것은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이에요. 저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절망에 빠진 누군가,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삭스업 무브먼트’의 기본 취지예요. 

‘삭스업(SOCKS UP)’이란 축구를 하다가 선수들이 양말을 끌어올리는 행동을 말합니다. 파울을 당하거나 넘어진 선수가 양말을 끌어올리는 걸 본 적 있으시죠. 또는 프리킥이나 코너킥을 하기 전에도 양말을 끌어올리는 행동을 자주 합니다. 삭스업은 중요한 일을 할 때 마음을 다잡는 행위예요. 거기서 착안했어요. 희망이 없거나 좌절한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마음을 다잡도록 삭스업시켜 주겠다는 거죠.


실제로 나눔을 행한 사례가 있나요?

첫 양말 수익금으로 아프리카에 사는 17살 샤킬레라는 아이를 데려와서 프로 축구팀에 테스트를 하게 했어요. 그 친구는 저에게 5년 동안 1백 통의 이메일을 보냈어요. 자기가 사는 곳에서는 기회가 없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데 기회를 달라고. 

샤킬레의 간절함이 마음을 움직여 삭스업 무브먼트의 첫 대상으로 정했어요. 그 아이를 데려다가 프로 축구팀 FC서울과 대구FC에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테스트를 부탁했습니다. 샤킬레가 축구선수로 성장할지 못 할지는 아직 몰라요. 안 될 가능성도 많죠. 그 아이의 실력을 모르니까요. 중요한 것은 프로 축구팀이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아이가 꿈을 버리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래서 살아갈 희망을 찾는 것. 그것이 삭스업을 세운 이유예요.


지금의 삶, 성공했다고 생각하세요?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이렇게 말했어요. 

“인간에게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정확한 말이에요. 꿈을 이루는 순간 더 큰 비극이 찾아와요. 목표 자체가 비극이라면 그것을 좇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성공을 좇는 것이 곧 비극을 향해 가는 것일 텐데요. 저 역시 어린 시절에 안간힘을 쓰고 비극을 향해 달렸지만, 하나님을 믿고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는 오직 죽는 순간에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비참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고, 또 다 끝난 것 같았는데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많이 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만나는 순간까지 그 누구도 성공이나 실패를 장담할 수 없다고 봐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철저히 주님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달려가는 길이 하나님 기준에도 옳은 것일까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빛과소금 독자들에게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호가 빛과 소금이니까…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밴쿠버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데, 2017년 어느 겨울날 눈이 내렸어요. 그날 새벽기도를 하고 오전 6시에 문을 여는 동네 카페에 갔는데 시간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거예요. 마을 전체가 불이 꺼진 것을 보고 정전이 된 것을 알았죠. 잠시 불이 들어오길 기다리기로 하고 차에서 기도를 했어요. 

20~30분 기도하고 눈을 떴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어요. 가로등 불은 꺼져 밖이 어두운 데다가 펑펑 쏟아진 눈이 차창을 다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죠. 그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내 눈으로 내가 빛을 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빛이 차단되자 나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그 순간 내가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나를 보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빛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빛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두란노, 빛과소금 (취재 서진아, 사진 정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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