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가난> 가난을 웃게 하자
학자금 대출로 쌓인 빚과 높은 실업률 그리고 불안정한 주거환경 등으로 힘겨운 청년들, 노후 준비가 부족해 취약계층으로 전락한 50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빈곤율이 높은 60∼70대 등 우리 주변엔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가난은 행복의 원천이며 우리가 아무리 가난을 재앙으로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행복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란 톨스토이의 말이 위로되진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의 잘못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환경 때문에 가난의 굴레를 메고 힘겹게 살아야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떻게 우린 이 고난의 강을 건너갈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가난과 불행을 동의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난’은 행복의 반대말이 아니다.
가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독일 최고 유력지의 편집자였던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는 회사의 해고통지를 받고 이때야말로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애써 웃음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는 남은 근무시간 일부러 즐거운 척했고, 마지막 날까지 정장 차림으로 출근했다. 그가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모에게 배운 삶의 태도 덕분이었다.
독일의 귀족이었던 폰 쇤부르크 가문은 소비에트 점령군 시절 재산을 몰수당했다. 아버지는 성에서 보석이나 은그릇을 챙겨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곁에서 생전 처음으로 사냥한 작은 숫양의 뿔을 가지고 나왔다. 삶의 동력을 제공하는 소중한 추억을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기술’을 선택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들로 중무장하는 동안 절약의 기술을 완벽하게 실행했다. ‘포기의 기술’은 그 어떤 낭비벽보다 미학적인 이유에서 우월했다. 불필요한 것이 없는 삶과 공간은 훨씬 더 품위 있다.
폰 쇤부르크는 저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서 가난하지만 부유하게 느끼는 방법으로 너도나도 욕심부리는 곳에서 포기할 수 있는 능력, 타인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는 자주성을 제시했다. 경제적 어려움은 전적인 불행이 아니라 우리 생활방식을 세련되게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택한 삶은 많은 돈이나 물건을 쌓아두는 것과 무관한 듯하다. 인간은 올바른 태도를 통해서만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거나 소유하고자 할 때, 불안은 점점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만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오히려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어느 지점부터는 소유에 대한 감격이 없어진다. 경제학에선 이를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일상적인 묵상과 묵상의 내면적 체화, 자신을 조절하고 즐거움을 누리는 연습, 끓어오르는 본능을 다스리는 이성의 수립 등 이런 일에 드는 비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를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이다. 거기에 적은 돈만 합쳐진다면 그것은 재능 없는 자의 풍족한 재산보다는 비할 바 없이 이롭다.
빈자(貧者)의 예수
성경은 ‘가난’에 대해 영적인 가난과 물질적인 가난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가난’이란 단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헬라어 ‘프토코스(ptokos)’로 ‘파산을 당하거나,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이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파산당한 사람처럼 스스로 설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비워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인 되게 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이 복되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심령의 가난이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이다.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심령이란 단어가 없다.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빈자(貧者)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 2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했다. 여기서 부자는 영적인 부자가 아니다. 실제로 돈이 많은 부자를 말한다. 이어 24절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가난한 사람은 낙타가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기가 쉽다는 말과 같다.
목회자들은 가난한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서울 응암감리교회 이기철 목사는 “정말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어 ‘제겐 주님밖에 없어요’라고 고백할 때가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며 “이런 때 하나님 앞에 들고나올 것도, 잘났다고 할 거리도 없기에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교회가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사회를 향해 열린 교회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진정한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주님이 이 행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가난해진 마음을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내어놓으면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눈이 그 자체로 아무 빛을 내지 않으면서도 모든 빛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모든 영혼을 감쌀 수 있다.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동화 작가 권정생은 생전에 “세상에서도 이렇게 고생하며 서글프게 사는데, 예수까지 믿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삽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산문집 ‘빌뱅이 언덕’에서 행복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 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됐다. 내가 다섯 살 때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도 조금씩 알게 됐다. 거듭나는 과정은 아마 이렇게 서서히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권 작가가 느낀 행복은 심령의 가난, 영적인 가난에서 비롯됐다. 이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일상적 깨달음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진실로 가난하다면 우리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자신 안에는 방어하고 사랑할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모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기에 당신으로 채워주시고 벗었기에 당신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시며, 낮아졌기에 높여주시고 홀로이기에 당신과 연합시켜 준다.
단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내가 남보다 전도를 잘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라는 마음이다. 자신이 성화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이에 대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더 선하다, 좀 더 낫다, 좀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것을 꼭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의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가난에 하나 더
10여년 전 강원도 원주 명봉산 기슭에 터를 잡아 귀촌한 시인 고진하 목사는 조금 불편해도 행복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의 집 대문에는 ‘불편당(不便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가 지은 당호이다. 도시에 사는 동안 늘 귀촌을 꿈꿔 왔지만, 막상 시골살이는 생각보다 불편했다. 시내는 차로도 족히 20분은 걸릴뿐더러 시골집은 자꾸 손봐도 고칠 데가 나왔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까닭은 불편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가로움은 영혼의 보석입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 살면서 나름대로의 사치를 누리고 살거든요. 작은 텃밭에 생명의 씨를 심어 가꾸는 기쁨을 누리고, 봄이면 각종 꽃을 뜯어다 화전을 부쳐 먹는 사치도 누리죠. 그리고 그런 기쁨을 이웃과 나누기도 하죠. 자본의 마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웃들은 그런 삶이 힘겨울 것입니다.”
그는 아내 권포근 사모와 함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잡초의 소중함에 눈떠 잡초를 먹고 잡초처럼 낮아진 겸허한 삶을 산다. 낮에는 낡은 한옥을 수리하고 텃밭을 가꾸며, 밤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대학과 도서관 등에서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시와 인문학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다. 시골 생활의 소확행(小確幸)을 누리는 그의 집엔 제비가 둥지를 틀고, 개구리와 뱀, 지렁이와 박쥐도 함께 산다. 최근엔 자연에서 배운 삶의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마음의숲)를 출간했다.
그는 봄이 와 꽃이 피면 꽃 마중을 하고, 태풍으로 쓰러진 꽃들을 기둥으로 엮어 세운다. 가뭄에는 하늘이 내려주시는 비를 기다리고, 겨울엔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실로폰처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삶이다.
국민일보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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