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 - 이장우 목사
자기 정체성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입니다.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오는데 등불은 바람을 견딜만한 힘도 여력도 없어 곧 꺼지게 될 것 같은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한 다윗이 혜성과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만방자한 골리앗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고 반드시 골리앗을 쳐서 물리치겠다는 다윗의 말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급히 전했고 사울은 급하게 다윗을 부릅니다. 사울의 부름을 받은 다윗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사울에게로 달려갑니다.
사울 왕 앞에서 선 다윗은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삼상17:31)라고 하면서 일단 사울을 위로하고 안심을 시킵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의 위협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으며 군인들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울도 예외 없이 두려워 떨고 있으니 떨지 말라고 위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도 어린 목동의 신분인 다윗이 왕의 신분임에도 두려워 떨고 있는 사울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위기가운데 빠졌을 때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야 합니까? 이런 모습 속에서 사울은 이미 왕의 권위가 서서히 사라지는 지는 해이고, 다윗은 떠오르는 해와 같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일단 안심시키고 난 후 자신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을 뭐라고 표현하고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삼상17: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34)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36)
다윗은 반복해서 자기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의 종이나 목회자, 선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처음으로 창세기에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칭9:25)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이 말하고 있는 주의 종이란 “노예, 종, 신하”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 앞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게 해 달라고 직접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사울 왕의 신하, 종’이라고 하므로 사울 왕에 대한 순종과 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싸움의 대상인 골리앗을 ‘저 블레셋 사람’이라고 익명으로 제시함으로써, 골리앗에 대한 멸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골리앗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능력을 갖춘 강력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익명의 무가치 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저 사람’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으로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했던 그 골리앗이며,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을 두려워 떨게 만들고 도망가게 만들었던 바로 그 골리앗을 마음에 두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이 ‘사울 왕의 종’이라고 했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이 한 마디의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예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시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는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 내가 가는 믿음의 길에서 왕이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며 왕이신 주님께 충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그렇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정체성의 믿음의 고백이 나를 살립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글, 이장우 목사
성남열방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