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인정하기 - 이장우 목사
상대방 인정하기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좋은 관계 속에서 살면 그만큼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꼬인 관계 속에서 살면 그만큼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푸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할 때 매임과 묶임에서 그만큼 자유하게 됩니다. 알량한 자존심이 인정하는 것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라고 말합니다. 미세한 떨림과 같은 감정의 변화가 오니 다윗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고 작은 변화 한 가지가 더 있으니 내가 원수로 여기고 죽이려 했던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합니다. 본래의 의미는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가 먼저이고 다음 의로운 이유가 ‘나는 너를 학대하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기’ 때문에 사울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의롭다고 인정합니다.
여기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라는 말은 재판 결과 무죄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무죄함을 가리키는 ‘의롭다’다는 표현을 한 것은 다윗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음을 선언함과 동시에 무죄한 다윗을 해하려고 한 자신은 범죄하였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사울은 지금 다윗의 결백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과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죄가 없는 의로운 다윗은 찾아서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동굴 안에서 손쉽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죽이지 않은 사실을 들어서 다윗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학대를 학대로 갚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 갚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끈질기게 괴롭히며 기필코 찾아서 죽으려고 했으나 다윗은 오히려 자신에게 선으로 갚은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사람이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평안히 가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 자신을 다윗의 손에 붙이셨으나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다윗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자신의 옷자락을 보고 확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자신을 붙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잡아끌어 동굴 안에 가두어 놓고 다윗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회의 기회를 사용하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한 가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자신이 다윗을 원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말이 사울에게 잔잔한 감동이 되어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리에까지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었듯이 요셉도 형들에게 선을 베풀었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그만 형들에 의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아무런 죄 없이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형들에 의해서 고통을 당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고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에 형들이 요셉에게 당할 보복을 두려워합니다. 이 때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형들과 그 자녀들을 잘 돌보고 섬기겠다고 하면서 형들을 위로하며 선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기도해주고 축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통치하심으로 주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 때 주님이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인정하고 남은 인정하는 것이 나를 살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임을 알아 인정하는 삶을 살면 더 자유하게 됩니다.
글, 이장우 목사
성남열방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