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or 은혜 (창세기 42:26-38) - 박정제 목사
죄책감 or 은혜 (창세기 42:26-38)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다. 어제 작은교회 이야기를 쓰다 보니 그 교회가 설립 12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음에도 여기까지 챙겨주시며 교회를 격려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내가 놀랐다. 역시 주님은 놀라우신 분이시다. 우리가 믿고 따를 유일한 분이시다.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에는 야곱에게 돌아간 요셉의 형제들이 전후 사정을 아버지 야곱에게 말하며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광경이다. 34절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그들의 돈을 받지 않고 도로 보내주고 시므온만 데리고 있으며 형제들을 구원할 통로가 되기 원했다. 그러나 그런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형제들과 야곱은 이 일로 큰 근심을 한다. 35절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 돈뭉치는 횡재요, 축복이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기에 큰 두려움이 된 것이다. 아울러 요셉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니 선의가 두려움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자칫 요셉이 형제들을 고통스럽게 하느라 이렇게 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이 모든 요셉의 행동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셉의 행동에 문제가 아니라 해석하는 이들의 죄책감에서 이런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요셉은 선의로 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베냐민을 아버지가 보낼 수 있도록 여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을 가진 이들은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가려는 계획처럼 생각한 것이다.
이런 죄책감이 선의를 두려움으로 만들고 그 두려움은 이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어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해하는 상황이 된다. 36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아버지 입장에서 요셉도 잃었는데 그리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베냐민까지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 이 상황을 해석하면 누구도 이런 해석이 당연하다. 형제입장에서도 베냐민을 데려가야 하는데 자신들이 돈을 훔친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려서 돌아가기가 어렵다. 여기에 아버지가 저렇게 생각하니 너무 힘든 것이다. 완전히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분명 선의로 진행된 일인데 죄책감을 가진, 상처를 가진 이들에게 선의가 지옥을 경험하는 사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깊은 묵상의 주제가 된다.
이때 이런 지옥같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사람이 나온다. 37절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장남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며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은 가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한다. 또 아버지가 베냐민을 동행하게 하지 않으면 가도 소용이 없다. 그러기에 누군가 책임을 지는 사람이 필요할 때 장자였던 르우벤이 일어나 이 상황을 책임지며 나선 것이다.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베냐민을 맡겨달라고 야곱에게 부탁한다. 그럼에도 상처가 치료되지 않은 야곱은 허락하지 못한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을 그는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상처를 깨고 나와야 변화가 일어나는데 야곱은 상처가 만든 감옥안에 갇혀서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오랜 시간을 그들은 기다려야 했다. 상처는 우리로 변화를 더디게 하고 변화의 때를 놓치게 한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선의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베풀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배운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선의를 베풀 때 생색내는 것 같아서 이런 선의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아서 선의가 아픔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을 묵상하게 된다.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소중하게 전달해 주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요셉 입장에서 아직 자신의 상처를 다 열지 못했기에 다 보여줄 수 없어 이렇게 몰래 돈 자루를 넣어 주었다. 그러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일이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부담이며 두려움이 되고 오해가 되었던 사실을 깊이 묵상하며 선의의 자리도 아주 조심스럽게 그 마음을 보여주는 배려가 섬세하게 필요함을 깨닫는다. 주여, 라마나욧이 이런 배려가 있게 하소서.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해 르우벤의 책임지며 상황을 반전시키는 모습을 본다. 비록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이런 르우벤의 모습은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 해하는 관계였던 이 가족을 치료하는 항암제였다.
그렇다면 르우벤은 어떻게 이런 반응을 할 수 있었는가? 근본적인 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진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죄책감을 넘어 요셉의 말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일말의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일어선 것이다.
죄책감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지 묵상한다. 그러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을 가지고 반응할 때 얼마나 놀라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도 깊이 묵상하는 아침이다.
오늘이란 삶이 죄책감으로 반응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반응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스도 보혈의 은혜를 믿지 않으면 내 삶은 어쩔 수 없이 죄책감에 의해 반응되어 선의를 오해하는 그런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 이 하루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은혜로 반응하며 하루를 살아가자. 아울러 지옥을 천국 가정으로 바꾸는 변화의 사람 르우벤의 책임지는 사랑을 믿음으로 실천하자. 주님 이 종이 죄책감에 빠져 선의를 두려움으로 만드는 죄와 사단의 세력들 앞에서 이것을 분별할 수 있고, 또 그 상황을 천국으로 바꾸는 책임지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소서. 책임져야 할 자리에 도망가거나 숨지 않게 하소서.
글, 박정제 목사
라마나욧선교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