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에 이르기까지]-3 현명인목사
[로마서 5: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복음(福音) : 소망에 이르기까지]-3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하여 대언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를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여기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에 뜻에 합당한 자로 쓰임 받기 위해 우리의 전인격을 걸고 살아계신 주님께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어떤 결론이 내게 주어지더라도 그 결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전인격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바울은 매우 인상적인 방법으로 이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3).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시지 않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감사드려야 합니다. 한결같지 못하고 항상 죽 끓듯 변하는 우리의 성품으로 주님의 성품을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복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약속을 알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결 같으심을 알고 그 분의 힘과 능력을 압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대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탄의 미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반신반의 하는 자문을 금해야 합니다.
다섯째, 주님의 지령을 따라 복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해야 하고, 삶의 한복판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그 확신의 증거를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 분을 신뢰하고, 온전히 나를 드리면서 의탁해야 합니다. 온전한 의탁은 영적 오감을 열고 가난한 심령으로 말씀을 청종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과 또 다른 사도들의 외침과,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로 던져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외침과, 세대를 뛰어 넘은 복음의 증거자들의 외침은 무엇으로 가능했었습니까?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넘어, 소망에 이르는 믿음 때문 이었습니다.
세상 어떤 권세도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믿음의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위에서 복음으로 호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망에 이르기까지 담대히 정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놓고 철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허상적 논쟁은 오히려 믿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복음은 허상이 아닌 삶과 인생의 실제이며, 한시적인 육의 생명을 영원힌 생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될 때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너머 소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竹(대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 땅에, 10만 여 종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나무는 전체 식물의 25%를 차지합니다. 그 나무들 중에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나무 한 종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대나무를 선택합니다.
예로부터 문인들 묵화의 대표적 소재가 사군자(四君子)입니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첫 꽃 매화의 그 신비, 깊은 산 속에 숨어서 멀리까지 은은한 향기를 보내는 난초, 늦가을 추위를 이기며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탐스러운 국화, 가늘지만 높게 치솟아 오른, 그러나 꺾이지 않고 굽히지 않는 꼿꼿하고 단단한 대나무를 소재로 한 묵화가 사군자입니다. 덕과 학식과 인품을 상징하는 소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나무는 특별합니다. 모양이 우아한 곡선입니다. 모든 나무들의 모양이 제각각인데 대나무의 모양은 동일하게 날씬한 기둥 하나뿐입니다. 보태거나 뺄게 전혀 없습니다. 선비와 예지와 군자와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그만한 나무가 없습니다.
다른 나무들처럼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안 됩니다. 365일 중 단 하루, 음력 5월 13일에만 이식이 가능한 나무입니다. 참 까다롭습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고고함이요 준엄함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꽃피우기 힘든 나무인데, 한 번 필 때면 한 뿌리에서 나온 대나무는 나이와 무관하게 전체가 일제히 꽃을 피웁니다.
그 꽃씨가 땅에 떨어지면 5년 가까이 땅속에서 생명력을 키웁니다. 내공을 쌓는 셈입니다. 그러다가 5년차 쯤에 지표면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축적된 강력한 내공에 의해 그 어떤 식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무서운 돌파력과 성장속도를 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대나무 숲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큰 변을 봤습니다. 모자는 앉은키 만큼의 죽순에 걸어 놨습니다. 그런데 큰 변을 마치고 모자를 찾으니 그 새 죽순이 쑤욱 자라서 손이 닫지 않는 높이에 모자가 걸쳐 있더랍니다. 성장속도가 경이롭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신앙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실천의 내공을 쌓아야만 바른 신앙으로 견고하고 곧게 쑥쑥 자라게 됩니다. 기독교 이단의 괴수들은 균형 있는 신앙내공 없이 열정만으로 편향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는 죽순의 비축된 생명력은 콘크리트도 장애가 못 됩니다. 하루에 30cm가 넘게 자라기를 30m에 이르게 성장합니다. 단지 한 줄기로 곧게 가늘게 높이 자라는데도 온갖 모진 풍파에 꺾이지 않습니다. 수령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아름드리 거목들도 태풍에 뿌리 채 뽑히는 경우를 보는데, 대나무는 가늘고 길면서 그토록 강하기만 합니다. 왜 일까요? 마디가 있어서입니다.
대나무는 마디의 나무입니다. 속은 텅 비었으나 마디는 막혀 있습니다. 마디는 정지된 매듭입니다. 매듭을 짓고 또 자라고, 또 매듭을 짓고 또 자랍니다. 마디의 힘이, 그 정지되었던 힘이 대나무를 강하게 합니다. 꺾이지 않고 굽지 않으며 곧게 자라게 합니다.
매듭은 일시적으로 성장을 멈추게 하는 고통입니다. 인간역시 인생을 사노라면 정지의 고통이 있습니다. 막히고 닫히고 아픈 일을 만납니다. 거기서 포기하면 상실이고, 거기서 성장의 미래를 보면 더 강한 힘을 얻습니다. 매듭 짓는 고통의 기다림이 있어야만 모진 풍파에 꺾이지 않고, 곧고 굳게 성장 할 수 있습니다.
'success(석세스)'는 성공이라는 suc과 죽음을 뜻하는 cess의 합성어입니다. 성공은 죽을 지경의 고생 끝에 옵니다. 정지되어 마디가 만들어지는 고통과 인내를 이겨낸 후에야 성공의 감격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passion(패션)'은 '열정'을 뜻하나 중세시대 영어에는 '고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의 열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을 향한 믿음의 열정에도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나무의 정지된 마디가 대나무를 강하게 하듯, 벼랑 끝 멈춤과 같은 우리 삶의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넘어 소망을 향해 질주하는 믿음의 에너지로 전화위복 되게합니다. 여러분 모두 소망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길위에서 믿음의 정진을 힘차게 이루어 나가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RANATHA !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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