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의 시간 (이사야 36:1-10) - 박정제 목사
조율의 시간 (이사야 36:1-10)
<스콘> 앱 개발을 위한 40일 기도회 26일째다. 기도는 인생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의 소통시간이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이다. 기도는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조율의 시간이라 생각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조율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조율이 필요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죄인된 우리 인생이 하나님으로 조율되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게 하시는 조율의 시간이다. 아멘.
조용히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내 삶이 주의 역사와 나라가 되어지도록 조율하는 시간이며, 우리의 작은 마음이 돌이켜 주님의 꿈을 꾸게 하는 시간이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손에 조율되어 주님의 온전한 꿈이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은 금요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설렘을 가지고 맞이하는 금요세미나다. 주님 이 종을 기름부어 주소서. 진정 주님이 조율하사 주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되게 하소서. 오시는 분들 한분 한분을 주님이 터치하여 주소서.
이날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 등장한다. 바로 유다의 유명한 왕 히스기야 왕 14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1절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군대를 동원하여 유다를 쳐서 유다의 46개성이 완전히 점령되고 오직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성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때 산헤립이 랍사게 즉 왕의 최측근 신하를 보내 유다의 총리를 비롯한 3명의 신하들과 만나 협박하는 장면이다.
그런 협박의 내용에 이런 말이 나온다. 4절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믿는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대체 뭘 믿고 나와 맞서는 것이냐? 너의 행동은 허세일 뿐이다. ... 대체 뭘 믿고 나에게 맞서 반항하느냐?>
오늘 이 말씀이 내게 큰 도전적 질문으로 들려진다.
<오늘 나는 뭘 믿고 이 앱 개발에 도전한 것인가?>
다윗이 사울의 갑옷마저 입을 수 없는 그런 초라한 복장으로 골리앗앞에 서듯 오늘 <스콘>앱 개발은 그야말로 이런 질문을 받기에 딱 알맞은 모습이다.
기술도 없고, 능력도 없고, 내용도 채울 수 없다. 오직 주님의 마음 하나를 붙들고 시작했고, 지금도 의지할 것이라곤 그것 하나밖에 없다. 오늘의 찬양 가사처럼 황폐한 땅 한 가운데서 주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
그러면서 랍사게는 오늘 유다의 왕과 백성들이 생각하는 대안을 콕 찍어서 지적한다. 6절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오늘 이 일을 진행하며 수시로 애굽을 대안으로 믿어보려고 한다. 처음 파트프라임을 애굽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또 여러 사람들을 애굽처럼 생각하여 의지하려고 하기도 했다. 인생의 얄팍함이란 늘 그런 것이다. 유다도 그렇게 애굽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헤립은 그것을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사실 이 소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외친 소리이기도 하다.
인생은 하나님이 외칠 때는 농담처럼 듣는 롯의 사위 같은 죄성이 있다. 그리고는 원수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는 못된 심성이 있다. 오늘 유다가 그렇고,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본다. 주님 ~
산헤립은 여기서 하나 더 외친다. 히스기야가 한 산당을 폐한 종교개혁을 비판한 것이다. 7절 ‘혹시 네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노라 하리라마는 그는 그의 산당과 제단을 히스기야가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던 그 신이 아니냐 하셨느니라.’
다신교를 믿는 산헤립 입장에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오히려 여러 신들을 분노하게 하는 사건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조율 시간을 헤치며 조급하게 반응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8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
이 말은 유다의 군사력을 정확히 파악한 산헤립의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유다의 실체를 드러내며 애굽이 도와서 말과 병거를 도와준다 한들 태울 기병이나 있느냐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이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말은 정말이지 무서운 말이다. 손에 잡은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여 출발한 이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여기서 낙오한 수많은 주의 일꾼들이 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삶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신앙이란 오늘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직시해야 한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현실도 알지 못하면서 허공에 외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달려오고 앞에는 홍해가 막힌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팡이를 내어 밀고 홍해로 들어가는 일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로 현실을 직시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산헤립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오늘 유다를 침략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왔다고 외치기까지 한다. 10절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냉정하게 산헤립의 말은 맞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조율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른 행동일 뿐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맞아도 하나님과 조율되지 않은 인생의 행동은 산헤립과 같을 뿐임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욕망의 분출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는 자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심판하신다. 아멘. 아멘.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네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남는다.
46개 성이 무너졌다. 예루살렘도 완전히 포위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는 소리를 들은 히스기야의 심정이 오늘 아침 큰 공감으로 다가온다.
<스콘> 앱 개발의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감히 처참한 전쟁의 상황과 비교할 수 없지만 ~ 조금은 공감이 된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게 하시면서 주님은 물으신다. 너의 믿음은 무엇이냐?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말 이천필이 아니다. 그야말로 돈 20억이 아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믿고 하나님과 조율된 삶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옷을 찢으며 기도했던 것처럼 ~
현실을 외면한 채 망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분명한 현실속에서 하나님과 조율된 모습으로 바르게 반응하는 이 하루가 되어야 한다. 주님, 이 하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모든 승부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조율된 언어, 조율된 믿음의 행동임을 알아 바른 대처를 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주님, 인도하소서.
<라마나욧 선교회 중보기도 제목>
1. 2022년 예수님의 속도와 방향에 맞추어 변화되게 하소서.
2. 스콘(스스로 창조하는 콘텐츠)앱이 젊은 세대의 플렛폼으로 설 수 있도록
3. 라마나욧선교회의 사단법인 작업이 잘 이루어져 건강한 선교단체 되도록
4. 30억 씨드머니가 속히 모금되어 사역이 정상화되도록
5. 땡스기브가 견고하게 세워져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글, 박정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