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길잡이11강 [‘성찬’(聖餐)]-1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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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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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길잡이11강 [‘성찬’(聖餐)]-1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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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고린도전서 11:23-27)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신앙길잡이11강 : ‘성찬’(聖餐)]-1


  성찬은 '산제사'와 '영적예배'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것 이상의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준수하고 있는, 의미 깊은 식탁의 교제인 ‘성찬’을 예수님께서 제정하셨는데, 때는 오랜 유월절을 기념하는 중,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이었습니다.


  성찬은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예식입니다. 구약의 피흘림이 없는 제사는 제사가 아니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예배도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고 살을 찢기신 것을 기념하는 성찬이 없다면, 그 예배는 산제사와 영적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매 예배때마다 성찬식을 하지 않고, 절기나 월 첫주 등으로 그 횟수를 줄여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들마다 이유가 있을테지만 어떤 이유도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인본적 관점에서 나온 이유가 아니라면 성찬식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또 미래에 있을 사건이지만 곧 도래하게 될 그 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찬은 슬픈 마음이 아닌,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참예 해야 합니다.


  출이집트(애굽)이전, 이집트인들의 장자들에게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로는 죽음의 사자가 그냥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그들의 집 문설주에 뿌려진 양의 피가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월절 절기의 시작이 되었고 성찬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 때 피를 뿌리기 위해 잡았던 양은 구워서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 걸쳐 이 축제가 기념이 되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출 12장)


  (출애굽기 12:13-14)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하지만 이 보다 우선하여, 인류 범죄의 발단 과정에서 나온 사건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기 직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일입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과 부자간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후 배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것은 이사야 28장20절 말씀처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고,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았습니다.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만든 의의 누더기는 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넓고 튼튼하고 질긴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그들의 의복을 위하여 가죽옷을 마련하신 것은, 가죽옷의 진주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예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르며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유월절 절기 중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떡 한 조각을 취하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것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들에게 주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마찬가지로 식후에도 잔을 취하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1)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식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식사 후'와 '식사 중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떡을 먹으면서 포도주를 계속 마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 끝날 무렵,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기뻐하면서 찬미했지만 잠시 뒤 그들 모두는 감람산으로 향하게 됩니다(마 26:29-30). 거기서 예수님은 예언대로 유다에게 배신 당하셨고, 그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마지막 성찬을 나누시면서 '나를 기념하라'하신 말씀을 교회들이 지켜오게 된 발단이 된것입니다.


  성찬에 관한 이 내용은 4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26-29; 막 14:17-25; 눅 22:7-22; 요 13:21-30).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 23-29절에서 성찬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내용은 4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고전 11:27-29)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가 ‘죄를 짓는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예식인 성찬을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할 것인데, 오히려 죄를 짓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성찬에 임할 때는 우리의 마음 자세를 주님 앞에서 바르게 다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찬을 대할 때 죄를 짓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1)떡과 잔이 주는 생명의 의미를 무시하고, 그냥 눈에 보이는 떡과 포도주로만 여기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2)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그 대속의 죽음을 망각한 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3)성찬을 형식적이거나 죽은 의식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회개하지 않은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최후이 만찬 이후에 예수님을 파아넘긴 가룟유다의 죄와 같습니다.


  (4)이 중에 한 가지 항목이라도 해당 된다면, 나머지 세 개 항목 모두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1: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찬에 대해서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하게 합니다.


  (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즉,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질동안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육으로 사는 동안 매 순간 접할 수 밖에 없는 것들, 곧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두 가지의 부서지기 쉬운 요소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을 땅과 바다로 삼으실 수도 있었고, 건물로써의 성전과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로 삼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예수님 자신의 몸과 피의 상징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6:30-32)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가 염려 근심하면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이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 말씀은, ‘먹고 마시는 세상의 밥상에 얽매이지 말고, 먹고 마시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름다운열매맺는 좋은나무교회

<아둘람복음공동체 현명인목사>

Adullam Ministry &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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