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주일 [예수님의 두 음성]-1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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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주일 [예수님의 두 음성]-1 현명인목사

현명인 0 1255
[요한복음 18:4-9]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승리주일 [예수님의 두 음성]-1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덧입으면 의로운자로 칭해주십니다. 그 위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낳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매우 크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의 생일이 돌아오면 맛있게 먹으라고 고기반찬에 미역국을 끓여주십니다. 고통스러웠던 해산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은 이에 비할 수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 크나큰 기쁨의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놈 볼 때마다 해산의 고통이 먼저 떠오르고, 자식놈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 고통이 트라우마가 되어 어머니의 머리속을 헤집어 놓는 경우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 역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고난의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성령의 인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승리를 기념해야 할까요? 
  시편 2: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고난의 결과가 아닌 승리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만을 생각하고 이것을 기념하여 고난에 동참하라고 종용하는 것은, 행위도 구원의 방편으로 보고 있는 유대사상 곧, 율법적 윤리와 도덕에 기초한 천주교 신학에서 나온 그릇된 종교적 관습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사코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으니, 나도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금식하련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고행을 하련다’ 하는 말로 고집부린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생일에, 세상에 태어나도록 해산의 고통을 겪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날 하루종일 굶고 고행을 해야합니다. 

  '어머니는 왜 그 고통을 겪으면서 나를 낳으셨냐’ 탄식하면서 해산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생일 미역국도 먹지 말아야하고, 고기반찬도 먹지 말아야하고, 잡채도 먹지말아야 하고, 그냥 쫄쫄 굶으면서 울상에 슬픈 표정을 짓고 그 날을 보내야 합니다. 생일의 기쁨보다 어머니의 해산의 고통이 더 크게 생각되는 분들이라면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일을 기뻐하고, 맛있는 음식먹고, 축하받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그 주간을 고난주간이 아닌 승리주간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못 박히신 고난의 금요일이 아닌, 승리의 금요일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예수님의 고난이 아니라, 대속의 죽음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고통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신성을 마취제처럼 사용하여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느까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울러 이것은 개혁주의적 성경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메시아의 권위와 능력이 나타난 신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 모두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가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러져 말씀하신 분께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신적인 권위의 말씀 한 마디로도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내가 그니라'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게 됩니다. 신적인 권위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의 말이었고, 죄인으로 취급당하여 잡힐 수 있는 초라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번째 말씀 때문에 결박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만약, 예수님이 첫 번째 말씀만 하시고, 두 번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 온 지면 위에는 죄인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죄인으로 살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죽음의 문턱을 힘겹게 넘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신적 권위만 내세우게 될 경우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는 장면도 성경에 기록 되지 않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도, 부활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메시아를 예표한 구약의 모든 말씀도 거짓말이 됩니다. 메시아의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해프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사람의 죽음도 하나님의 심판도, 천국도 지옥도 믿을수 없는 픽션 소설로 취급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는 여전히 죄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습니다. 신적 권위만 내세우는 신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결국 대속할만한 의로운자는 인간들 사이에서 찾아야 하는 과제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너나 나나 똑같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죄를 대속해 줄만한 자를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 온 지면의 구석구석에 가득할 뿐입니다. 결국 모든 인류는 사망이 쏘는 죄에 맞이 둘째 사망을 향하여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예수님께서 두 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비록 힘없고 나약하여 잡힐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음성이지만, 그 음성 때문에 예수님이 죽고 우리가 살게 된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니라’하신 두 번째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 두 번째 음성 때문에 예수님이 고초를 겪으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번째 음성이 자신을 고통스런 죽음의 자리로 내몰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고난보다 더 큰 이 승리를 위하여 기꺼이 두 번째 음성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두 번째 음성은 나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죄인으로 취급당할 수 있는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은 우리의 모든 죄를 안고 죽은 음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음성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고도 천국을 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로 고백이 되면 그는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부활신앙으로 영생의 구원을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십자가 승리를 이루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맺혀진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 믿음의 역사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과 두 번째 음성은 우리에게 그대로 수평이동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음성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용을 쓰면서 발버둥 칩니다. 

만일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가장이 가족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장로가 집사에게, 선임이 후임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첫 번째 음성으로만 말하게 된다면 그 조직은, 그 집안은, 그 인간관계는, 그 부부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첫 번째 '내가 그니라' 하신 권위의 음성으로 부권을 내세우는 아버지가 다 성장한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고자 합니다. 과연 그 아들이 대화에 응하려고 할까요?

  남편과 아내가 대화를 나누는 데, 남편이 권위와 위엄만을 내세운 첫 번째 음성만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부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될까요? 반대로 아내가 돈좀 번다고 남편을 쥐잡듯이 잡아가면서 첫 번째 음성으로만 말합니다. 이 가정은 온전히 유지될까요?

  속 깊은 많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친구처럼 친근하고 자상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음성으로 말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권위 있는 음성으로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머지않아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어떤 조직에서도, 어떤 관계에서도, 어떤 모임에서도, 어떤 공동체에서도, 하물며 그것이 예배공동체라고해도 그는 결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게 됩니다.

  혈연관계인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중 누군가가 늘 권위 있는 첫 번째 음성으로 말을 한다면 아무리 가족이라고해도 그와 마음을 열고 대화에 응하지 않게 됩니다. 

  보통 어머니의 음성은 사랑이 가득한 두 번째 음성입니다. 자신의 자식을 안아주는 친밀한 음성이고, 못난 자식을 이해하고자 하는 따스한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음성이 은혜로운 음성인 것을 잘 알고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 하신 말씀을 두 번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두 번째 음성이 은혜의 음성입니다. 두 번째 음성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지만,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꿈꾸며 살아가게 됩니다.

  6절에 기록된 예수님이 첫 번째 음성은, 예수님을 잡으러간 자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질 정도로 큰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려졌다는 것은, 이 말씀이 강력한 신적 음성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즉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전능자의 음성입니다.

  잡으러 온 모든 자들 중에는 대제사장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생명의 복음을 가르치실 때에도 자기 밑의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지시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보냈던 자들이 예수님을 잡아오기는커녕,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잔뜩 받아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고 보고한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다그치면서 그들에게 묻습니다(요 7:45-48).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아무리 현란한 말을 해도, 잡으러 간 자들이 그 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직접 대제사장들이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과 함께, 마치 강도를 잡는 것처럼, 검과 몽치로 무장하여 예수님을 잡으로 오게 된겁니다(눅 22:52).

  그런데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을 들은 그들은, 그 분의 위엄하신 신적 권위에 눌려 뒤로 물러가 땅에 그대로 엎드러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요,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계속>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름다운열매맺는 좋은나무교회
<아둘람복음공동체ㅣ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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