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길잡이13강 [Ⅱ회개(悔改)]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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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길잡이13강 [Ⅱ회개(悔改)] 현명인목사

현명인 0 1537
[개역한글_시편 51:1-4]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신앙길잡이13강 : Ⅱ회개(悔改)]

  세례요한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죄를 용서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최초의 전도자가 선포한 첫 메시지는 바로 “회개하라” 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알 수도 체험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은혜로운 교제를 나누었던 시편 51편은 회개의 포괄적 문제와 그 교리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의 길을 걸어 갔던 자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의 기도를 한 마디로, <악을 행한 변절자 다윗의 참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왜 죽였을까요? 자신의 명예에 흠이 될 수도 있고, 창피하기도 하고, 자기 부하에게 미안하기도하고, 또 다른 부하들의 수근거림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다윗은 완전범죄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부하들이 전쟁터에 맘 놓고 출전이나 하겠습니까? 자기 마누라, 다윗이 왕이 되고 자리좀 잡더니 죽도록 충성한 우리들의 아내들까지도 다윗이 가로채려고 한다는 소문이 무성해지지 않을까요? 다윗은 어쩌면 이런 저런 생각에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우리아를 죽게 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맘이 편치 않았을 겁니다. '내가 이래도 되는건가? 내가 왜 한 순간에 눈이 멀어서 이런 죄를 저질렀나! 돌이킬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하고 회개할까?' 

  일 평생 수 많은 우여곡절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오늘까지 왔던 다윗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 사건의 주된 범죄가가 되었다는 심적인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회개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토록 큰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범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까? 하나님께서 내게 실망하셨을텐데, 하나님께서 나로 인하여 노하셨을텐데...' 

그렇게 끙끙 앓으며 혼자만의 고만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던 다윗 앞에 선지자 나단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주목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나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마치 책망 받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단선지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직고하며 회개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그 때는 왕의 신분이 아닌 오직 죄인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시편 51편을 통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게 되는지에 대한 단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죄의 무게를 느끼는 자들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분명 자기에게 충성을 다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후 자신이 자행 했던 죄를 스스로 덮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심적 고통은 커져갔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압박은 더했고, 밧세바의 임신으로 자신의 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명해져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부하였던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 죽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마침내 자신의 죄에 눈을 떴고, 공식적인 죄의 인정과 함께 낮게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시편 51편을 기록하게 된 배경입니다

  회개의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하던 일을 반드시 멈추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나의 마음에서 타오르는 분노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숨쉬듯 내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는 사람은 자신으로 인해 주변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험에 들고, 상처를 받는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만 싸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있는게 아니라, 영적인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사인을 주셔도 영적인 개가 되어 자기의 혼을 흔들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자신만의 세계로 또 다시 깊이 뻐져들어갑니다. 

  회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잘못을 변명하고 간과하고 망각하기를 숨쉬듯 하기만 합니다. 부디 자신을 살펴 보기를 강권합니다. 이것이 회개에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우리가 저지른 일의 성격이나 본질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다윗이 회개한 죄(sin)의 세 가지 측면은 죄과(transgression), 죄악(iniquity), 그리고 죄(sin)입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transgression)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iniquity)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sin)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죄를 가볍게 취급하고 등한시 여기며 사망이 쏘는 것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시키는 것은 는 것은 현대 교회가 저지르는 큰 죄악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 율법과 도덕을 전하는 것,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해 목회적인 설교를 하는 것도 죄악입니다.

  1절의 '죄과(transgression)'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일축해 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아를 내세우면서 말씀을 외곡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 해당됩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도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들은 자신이 먼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반역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달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알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2절의 '죄악(iniquity)'은 한마디로 불법으로 표현 할수 있으며, '구부러짐'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아주 악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비뚤어지고 구부려졌습니다. 자신의 뜻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생각대로 안되면 성질부터 내고, 안하무인겪으로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자기가 생각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체로 그들의 방법은 옳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옳지는 않으며,,,”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아무리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리 이론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해도 그 방법이 옳지 않으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성경은 명확하게 답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은 지속적으로 진실하거나 이타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방법은 이기주의적인 것이고, 타인을 아프게하고 병들게 하는 죄악이 됩니다. 

  다윗은 이런 죄악들이 말갛게 씻겨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기도한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언제 기도했습니까? 예수님 처음 믿었을 당시입니까? 한 30년 됐습니까?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죄악을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죄악을 씻어달라고 기도했습니까?

  '씻기다'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몸을 씻는다고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고 특별히 옷을 빠는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심하게 더렵혀져 있는 옷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아주 강하게 반복적으로 내리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이 자리잡고 있는 흉한 몰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도 심한 죄악의 몰골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 뱀을 꺼내서 죽이지 않으면 그 뱀이 여러분 안에서 주인행세를 합니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자기가 사단에게 조종 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자기가 옳은 줄 알고 그 악한 방법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내려치십니다. 그것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은 그냥 제멋대로 살다가 죽을때까지 내버려 두십니다. 여러분 혹시 살다가 하나님께 두들겨 맞게 돼면, “아~ 나를 살려주시려고 치시는구나” 하면서 감사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자기 안에 이런 비뚤어짐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갈망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기 원한다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3절의 '죄(sin)'는 히브리 의미로는 과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과녁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게 하는 모든 마음의 상태를 죄성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여러 행위들이 매우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히브리 의미로 자신의 행위들이 매우 파괴적이고, 여러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망가뜨리고, 성경적인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성을 깨뜨리면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 상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런 행위들에 대해 용서받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기도하고 있고, 자신의 범죄와 이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었는지 돌이켜 본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회개하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가서는 그 잘난 세치혀로 낱낱이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불로 던져질 것입니다. 진짜인지 궁금하면 회개하지 말고 그대로 살다가 죽으면 됩니다.

회개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분의 뜻을 거스르고 있음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 고백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밧세바 에게, 우리아에게, 전사한 병사들에게, 이스라엘과 내 백성들에게 "내가 범죄하여" 라고 고백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주께만 범죄하여" 라고 토로합니다. 일면 타당한 항변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백번 옳습니다. 자신의 소행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연루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과 회개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리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그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한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셨나이다” 마침내 현실을 직시하게 된 다윗은 자신 안에 있는 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죄성이 큰 산맥이라면 죄책감은 산맥에 있는 수많은 산 봉우리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은 단순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회개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처럼, 자신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요한은 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회개하시는 분들한테만 물어봅니다. 당신들은 대체 왜 회개합니까? 그리고 또,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못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구류 중인 미결수가 있습니다. 그가 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풀려난 그는 죄가 없다고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보석금을 내고 나온 죄인은 보석 기간에는 보호관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보석금 내고 임시로 풀려난 것을 편의상 표현하자면, 1단계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석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감옥은 사단의 손아귀를 상집합니다. 풀려났다는 것은 세상에서 임금 노릇하고 있는 사단의 미혹과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대속은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단 한번의 사건입니다. 즉, 구원은 사는 동안 변함 없이 지속 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1단계의 구원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알기에 힘쓰고, 작은 예수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사람이 다시 범죄하면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무신론자들은 1단계에 실패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는자들이라도 2단계에 실패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거나 바깥 차갑고 어두운 곳에 던져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2장14절의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의 시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는, 과거는 이미 지난 것이니 제쳐 두고, 현재로부터 하나님께서 부르실때까지 지속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영생을 위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취해 나가야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지성소)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에 대한 사단의 참소가 그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죄성을 건드려 죄를 범하게 하는 사단은 우리의 죄를 찾아 고발합니다. 여전히 행사 되고 있는 사단의 이러한 권리는 세상 사람 모두가 죄를 범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성과 죄를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그들이 1단계의 구원을 맛보았다고 해도 참소당한 이상, 그들을 천국에 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범죄하는 영혼은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한 회개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은 자기의 신부 될 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로 인하여 사단에게 참소거리를 제공하는 자가 되었자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이 두루마기를 빠는 행위입니다. 사단이 참소는 판사 앞에서 피의자의 죄를 찾아내 유죄를 증언하는 검사의 역할입니다. 사단은 이처럼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찾아 참소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은, 뽀족한 송곳 위에 서서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팔을 벌려 허우적 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에 날고 기는 목사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바리새인이 되고 서기관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루에 천번을 불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이 매우 강팍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이집트왕 바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한 가지 재앙을 만날 때마다 후회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거기까지 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바로가 많습니다. 범죄함으로 인하여 후회하고 두려워하기도하지만 거기까지 입니다. 마음을 찢는 회개는 안합니다.

  (2)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난 멸망하는 짐승이오' 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멸망하는 짐승이 되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이는 미련한 짓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라고 책망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강팍한 마음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결국 자기나라의 온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장자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을 만나게 했습니다. 구약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아버지 엘리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앞에서 온갖 죄악을 행하였습니다(삼상 2:25).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 엘리도 자식들의 악행에 대한 책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삼상 2:29-34).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뇌물을 매우 좋아하는 공직자들이 나라에 많습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사는 국민들이 있는가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경제적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성도의 본질을 지키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세상의 온갖 미신과 더불어 사는 교인들은 더 많습니다. 자신의 운명도 점치치 못 하는 점쟁이에게 찾아가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 같냐며 거액을 주고 굿을 하고 점을 보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TV방송에서도 무당 굿판 벌이는 장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졌습니다. 죄의 무게는 더 이상 무게로 느끼지 못합니다. 죄딱지가 온 몸에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이것들이 자신의 영혼을 집어 삼키기 전에 속히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대에, 세상의 문을 닫으시기전 부흥의 역사를 한 번 더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 동참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성격이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자백합니다. 

  여러분 모두 마음을 찢으며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부흥을 위한 믿음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MARANATHA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아름다운열매맺는 좋은나무교회
<아둘람복음공동체  현명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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