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짜리 - 이장우 목사
예수님 짜리
사울은 자신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을 주고 사위로 삼겠다고 약속한 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절체절명의 국가적인 위기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나라를 구한 다윗을 죽이려는 생각뿐입니다. 맏딸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이 와서 사울에게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고 귀띔을 해 줍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사울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여러 사람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침과 임신을 숨길 수 없듯이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숨길 수 없었기에 사울의 신하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좋게 여겼다’는 말은 다윗이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을 좋게 여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딸을 또 이용하여 다윗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음을 좋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사울은 먹잇감을 찾은 사자같이 즉시 작전에 돌입합니다. 다윗이 자신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기에 사울의 사위가 되는 일은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사울이 신하들에게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를 백 개만 있으면 다윗은 다른 지참금을 사울에게 주지 않아도 되는 조건입니다. 문제는 사울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를 원한다는 것은 다윗을 블레셋의 적진으로 보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려는 사악한 계략입니다. 이와 같은 사울의 악행에 신하들이 바람잡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고 미갈을 아내로 얻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부하들을 데리고 블레셋의 적진으로 생명을 걸고 들어갑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를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오는 것에 대하여 무한정의 시간을 준 것이 아니라 기한을 정해 주었습니다. 기한을 정해 주었다는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조급한 마음을 갖게 함으로 최대한 전투에 불리한 상황을 만들고 무리하게 하고 실수하게 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기한이 차기 전에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 이백 개를 사울에게 드림으로 사랑하는 사람 미갈을 신부로 얻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사울은 분명히 포피 백 개를 요구했는데 다윗을 왜 포피 이백 개를 준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성품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입니다. 약속도 잘 지키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성품을 파악했기에 단지 100개만 가지고 온다면 혹시 다른 것을 트집을 잡아 약속을 충분히 어길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 배인 200개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준비하여 사울로 하여금 약속한 것을 이행하도록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단순히 지참금 몇 푼으로 얻은 신부가 아니라 다윗의 목숨, 생명을 주고 얻은 아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가적인 싸움도 아니니 모든 군대를 다 동원한 것도 아니고 부하들을 일부를 데리고 블레셋 적진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다윗이 출발할 때부터 다윗의 생명을 내 던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 미갈을 신부로 얻기 위하여 적진으로 들어갔고, 자칫 잘못하면 사울의 계략대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이기게 하심으로 포피 200개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된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 삼아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복음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사 주님의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 짜리입니다. 예수님 짜리라는 말은 값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신부를 얻기 위해서 생명을 다했듯이 예수님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 삼으시기 위해서 생명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 짜리임을 인식하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글, 이장우 목사
성남열방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