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기 앞에서 - 이장우 목사
삶의 위기 앞에서
우리의 삶이나 신앙생활의 여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신앙을 지키며 나가는 길에는 위기와 고난, 시험이나 시련이 누구나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때로는 피할 길을 내시지 않으면 삶의 위기 앞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시고 감당하지 못할 것은 피할 길을 내시고 감당하게 하시니 조금 고통스럽고 힘은 들지만 그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던 다윗에게도 삶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당하는 삶의 위기입니다. 장인 사울은 눈만 뜨면 다윗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니 사위 줄일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감당할 있게 하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셨으니 그래도 목숨을 유지하고 길고 긴 위기를 잘 넘기고 결국에는 승리하게 됩니다.
사울이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할 때 요나단이 나서서 다윗을 변호하니 “사울이 맹세하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삼상19:6)고 합니다. 사울이 다른 이름도 아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요나단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다윗을 안심시키고 다시 데리고 옵니다. 다시 사울 앞에 선 다윗, 다윗도 요나단도 세상 물정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단창을 가지고 집에 앉았을 때에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게 되니 다윗이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또 탑니다. 사울은 이전에도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두 번이나 던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윗을 벽에 박아 다윗을 죽이려고 단창을 다윗을 향해 힘차게 던집니다(삼상19:9,10). 다윗은 왕의 사위요 또한 블레셋을 물리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악신에 접했을 때에는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을 안정시키는 사울의 충복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악령이 접하였으므로”는 악령이 사울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울이 집에 있을 때에 갑자기 악령이 사울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해서 악령이 사울 안에 이미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임한 것은 사울을 해하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며,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다윗의 위상이 높아지자 악령의 활동이 더욱 강하여졌으며 더 발작을 하게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금을 타고 있는데 갑자기 사울이 자신을 향하여 단창을 던지니 다윗이 단창을 피하고, 단창은 벽에 박히게 되고 다윗은 그 밤에 도피하게 됩니다. 사울의 단창을 다윗이 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몸이 참새만한 것도 아닌데 순간적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단창을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다윗이 단창을 피하는데 순간적으로, 창을 던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즉시로 피하는데 완벽하게 피합니다. 옷자락 하나 창에 박히지 않고 다윗의 몸이나 옷이나 그 어떤 것도 다윗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의 창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몸놀림이 민첩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피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죽음의 위기 상황에서 도피하여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순탄한 길만, 꽃길만 고속도로처럼 쭉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껍데기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목을 노리고 죽이려고 하는 일들이 수 없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삶의 위기를 여러 번 피하셨습니다.
우리도 지난 과거에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사 피할 수 있게 해 주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는 없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인도하시고 위기 앞에서 피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글, 이장우 목사
성남열방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