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이 이끄는 찬양
영성이 이끄는 찬양
지금부터는 찬양의 기본인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영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성이 찬양의 기본입니다. 영성이 결여되면 그냥 노래이고, 영성이 갖추어지면 찬송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스미디어의 발전과 포스트모던이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독교 음악도 이젠 그 빛을 드러내며 해가 갈수록 수많은 창작곡과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음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교회와 예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조금씩 인정하면서 기독교 문화의 발 빠른 도약으로 눈에 보이도록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찬양문화는 한국교회 예배의 한 기준을 세우며 많은 찬양 사역자들이 헌신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렇게 홍수처럼 범람하는 찬양의 물결 속에 진정한 영성이 살아있는 찬양을 만들고, 또한 영성 있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예배를 리더 하는 예배 인도자나 CCM 사역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예배 현장에 서있지만 진정한 영성이 이끄는 예배 인도와 찬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아니 규칙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현실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사역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역을 위한 찬양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인가?’하는 유치하지만 솔직한 질문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 대한 깊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본 구절에서 ‘몸’은 물질로 구성된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생각, 삶과 가치관, 관계와 사역 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과 뛰어난 실력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산제사(예물)로 드려질 거룩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우리를 상당한 착각 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자의 순수한 찬양 자체보다는 상품으로 포장된 그들만의 브랜드로 사역자들의 값을 평가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장비로 음악을 만들었느냐, 실력 있는 연주가의 반주와 리코딩을 사용하였느냐가 찬양 사역자들의 수준과 값어치를 정해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역을 위한 테크닉 보다 영성을 살려야 합니다. 물론 세상 문화와의 경쟁력을 갖추려면 그들보다 더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좋은 음향장비와 사역자의 테크닉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자로서, 실력이나 테크닉이 이끄는 찬양은 예배의 본질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겸손히 무릎 꿇는 기도와 영성으로 찬양문화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저는 찬양사역 자로서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사도행전 16장의 빌립보 옥중에서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를 생각합니다(행 16:25-34). 이들은 캄캄한 옥중에서 손과 발이 묶여있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주님을 찬송하였고, 이때 홀연히 큰 지진과 함께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린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을 일으킨 단초는 화려한 무대 위에 설치된 조명과 고가의 음향장비 그리고 찬양의 테크닉이 아닌 그들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이 이끄는 찬양과 기도로 그곳에 준비된 영혼인 간수와 그 집을 구원하는 결실을 낳았습니다.
요즘 기독교방송사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언론, 단체에서 역량 있는 신인 사역자 발굴을 위한 각종 대회들을 열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내 찬양문화를 이끌고 온 많은 사역자들이 바로 이런 대회들을 통해 발굴되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대회를 통해 찬양사역을 시작하는 분들이나 현재 현장에서 사역하는 동역 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 가 있습니다. 바로 화려한 상품으로 포장된 노래는 흘러가는 유행가처럼 늘 새로운 노래만을 추구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영성의 옷을 입고 외치는 찬송은 부르면 다시 부르고 싶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할 것이고, 보고도 또 보고 싶은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