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① 찬송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것
첫째, ① 찬송은 그 이름에 합당하게 하는 것
지금까지 찬양의 기능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내용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대견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를 위해서라는 이 성숙한 고백을 하기까지 저에게는 참으로 엄청난 내적 갈등과 아픔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쉽게 고백하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합니다. 제가 주님께 깨어지기까지의 고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입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 관료들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하는 것만큼도 사랑과 정성과 열정이 깃들어 있지 않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일하는 모습만 보아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혹시 표현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헌신하는 것을 뉘라서 감히 이러 쿵, 저러 쿵 평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임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체들의 행실에 대해 우리가 서로 권면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합당한 자세와 그 기준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죄송하고, 또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권면하려고 합니다. 다 같이 역대 상 16장 28, 29절을 읽어봅시다.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는 분명히 찬송을 비롯한 모든 섬김의 기준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입니다. 합당이라는 말의 뜻은 딱 알맞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꼭 맞는 찬송과 헌신을 하라는 뜻입니다.
옛날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가끔 흑백 TV를 통해 대통령의 해외 나들이 때에 행정부에서 주관하는 환송 및 환영 행사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김포공항에서부터 청와대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 차량 한 대도 세워놓지 못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일들이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나 아무튼 권위 좋아하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저에게 큰 도전과 무언의 메시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권위일망정 그것을 세워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명색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저의 불성실과 무책임한 모습이 너무나 초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습니다.
대중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다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찬송 중에 껌을 씹고 있는 사람,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찬양하고 있는데 옆 사람과 잡담이나 늘어놓는 사람, 매주 등산복 차림으로 나와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 심지어 화장실에서나 신을법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사람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하나님을 그저 인자하신, 좋으신, 편안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주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소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매너도 없이, 하나님을 만왕의 왕 운운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성도들에게 찬송을 시켜놓고 설교 노트나 뒤적거리는 목사님들, 찬송 중에 키득거리며 지난 주간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옆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철없는 어른들. 이 모두가 구약시대 같으면 아론의 두 아들들처럼 성소에서 불을 받아 죽어야 마땅한 모습들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찬송의 내용만 보면 대단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독재자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아보진 못했을 것입니다. 최대의 존칭어, 최고의 수식어입니다. 아! 그런데 찬송하는 그 모습이란!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을 송축하는 모습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모습에서부터 세상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요즘은 거의 모든 교회에 찬양단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성가대가 없어지고 찬양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교회가 점점 늘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부산 해운대에 있는 한 교회에 요청을 받고 사역하던 때입니다. 이미 그곳에는 찬양단이 있었습니다. 제법 규모가 있고 이름이 알려진 찬양단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초청되어 가기도 하고 여러 번 자체 발표회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찬양단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리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숙지했지만 그 문제 때문에 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차츰 외형적인 것, 의식적인 것, 의무적인 것에 치우친 찬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오를 하고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가 기억납니다. 첫날 그들 앞에선 저에게 총무가 일어서더니 그 찬양단의 회칙 등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뜻은 자신들이 지금 것 해왔던 전통에 따라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긴 설명을 다 듣고 일단 연습을 마쳤습니다.
주일날이 되었습니다. 10시 50분 예배를 위해 10시까지 모두 모여 연습과 기도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시가 되어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조금 지나서야 세 명의 자매가 와서 주섬주섬 세팅을 하기 시작합니다. 10:20분이 돼서야 마이크 세팅 소리, 드럼 조율 소리, 스탠드를 이리저리 옮기느라 분주했습니다. 20명의 찬양단원이 준비가 되었을 때는 10:40분이었습니다. 결국 기도도, 준비도, 연습도 없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배 끝나는 시간까지 실수도 없이 무사히(?) 아름답게 찬양단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분들도 찬양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한 달간 반복되었습니다.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울며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음 주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예배가 진행되었고 광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시간 내내 찬양단이 강대상 앞에 서 있습니다. 광고 시간에 목사님이 "지금 서있는 이 찬양단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해산합니다. 찬양단을 다시 구성하겠습니다. 기존의 찬양단원들도 찬양단원이 되려고 하면 정해진 오디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성도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예배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통쾌해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찬양과 기도와 예배를 주님이 흠향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주님께 합당한 것들만을 주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그 후 교회는 찬양단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놀라운 회개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를 하나하나 조각내셨고 그 후 회개하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더욱 넉넉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제가 그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또 다른 곳으로 파송될 때에 저를 배웅하는 성도들의 모습에는 처음 저를 맞이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