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물을 닦아준 CCM (1-3)
나의 눈물을 닦아준 CCM (1-3)
CCM [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용 면에서는 기독교의 정신을 담아내는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기독교 음악.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소리엘〉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일주일에 3~4번은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CCM이란 걸 알게 되었네요. 그 뒤로 전 많은 찬양들을 접했습니다. 중고등부 시절엔 〈소리엘〉찬양팀과 김수지님의 찬양으로 위로를 받았네요. 그러면서 차츰 성숙해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찬양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소리엘〉이라는 찬양이 으뜸이었습니다. 찬양을 들으면, 힘이 샘솟았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찬양을 소개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을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대충 이런 가사의 내용입니다.
나의 눈물이 주님의 아파하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존제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가 없고, 주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게 저희의 운명입니다. 또한 운명은 ‘면류관’이라 합니다. 우리 운명의 끝은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었던 사랑을 하신 예수님의 눈물이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께서 저희를 위해 감당하신 십자가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분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선택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저희를 선택하는 면이 더 빠를 것입니다.
나약한 이 존재를 십자가로 대신 사랑을 지으신 예수님께 무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고2 시절이 제게는 큰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지금에서는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저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그 느낌은 느껴본 자가 압니다. 진정 마음이 따뜻해지고, 뭉클해지는 시간이었지요. 지금에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온 것이 진정 험난한 길이었음을 압니다. 그런데도 저는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었던 것 같네요. 아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저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걸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오늘을 있게 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있게 예수님의 존재를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계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제 안에 아픔이 존재해야지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내 가슴이 무너져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감정을 느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순간은 왠지 모르게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시간이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온전히 내 안에 옆에 항상 계시는 예수님 그분을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어릴 적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이었던 거 같습니다. 분명히 제 귀에서 들리는 낯선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그 당시에는 아무런 답도 없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고통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환청’이란 겁니다. 그리고 ‘망상’이라는 질병이 제게 찾아온 것이었던 거죠.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가 제게 있었습니다. 그래도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방치하게 된 거죠. 그렇다고 인제 와서 누굴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고2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제가 입원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거죠. 저는 이 질병이라는 게 결코 저의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정신병은 걸려본 자만이 정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바로 정신병은 분명히 정신장애로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치유가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끊임없이 치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제가 바라는 것은 정신병은 앓아 본 자들이 더 잘 압니다. 이론적인 것만 가지고 환우들을 치료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요. 분명 그 병을 몸소 체험해 본 사람이 당당하게 말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병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들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험해 본 자가 치료하는 세상을 바라는 이유입니다. 저는 반드시 정신보건 사회복지사가 되어 많은 이들의 아픔을 실전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가 없는 사례를 만들어 보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결심하였습니다. 내년에 반드시 대학 3학년 편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가야 하는데 어쩌면 안 될 수 있어서 걱정됩니다.
그러나 저는 감당해 내렵니다. 제가 정신장애인들의 치료진으로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그리고 기도의 후원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아픔이 정녕 아픔으로만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걸요. 저는 병원에 있을 당시에 별의별 증상들을 겪어보았습니다. 심지어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포기할 수 없었던 세상에 단 하나 가족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로 형용할 수 없는 고마움이 저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일들이 정녕 우연은 아니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직시하여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저도 또한 제가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대입해가며 훈련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가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책을 쓰렵니다. 책을 읽으렵니다. 책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습니다. 저절로 책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글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는 반드시 어떤 문제든지 뚫고 나갈 힘이 길러지고 있답니다. 오늘 하루도 책을 읽었으며, 책 필사를 감당했고, 또한 어떤 책의 리뷰를 감당해 냈습니다. 그런 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이렇게 감당해 냅니다.
저의 마지막 목표는 ‘슈퍼바이져’입니다. 저는 수원에 계시는 장명찬 원장님을 존경합니다. 정신장애인들을 위해 서슴없이 대해주시는 원장님은 많은 이들을 세워주시는 정말 슈퍼바이져가 되십니다. 그런 원장님이 저의 롤모델이십니다. 저도 소리 없이 이렇게 감당하여 세상과 힘써 싸우려 합니다. 세상에 저로 인해 시끄럽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끝까지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아무리 지금 잘 나간다 해도 마지막의 길이 안 좋은 것으로 흘러가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렇게 끝까지 대통령까지 올라간다 해도 끝이 안 좋으면 안 오른만 못하단 것이죠. 사실 저도 아주 좋은 위치, 그리고 멋진 위치에 오르고 싶습니다. 인간이라면, 한두 번 노려볼만한 그 위치를 위해 달려가는 거 아닌가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고위공직에 오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저의 답은 오르고 싶습니다. 저도 저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제가 오늘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나에 초점을 맞추어봅니다. 어릴 적에 찬양으로 은혜받았음을, 그리고 지금도 찬양을 틀고 글 쓰는 작업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쓰기를 감당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모두가 최고의 승리자가 되시길 제가 응원합니다. 나의 눈물을 닦아준 것은 CCM이 아닌 분명 주님이란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듣는 찬양은 백지영 님의 〈여호와를 보라〉입니다. 마지막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반드시 널 안고 돌보시리라 ”입니다.
글, 명흥규